[최보식의언론=최보식 편집인]

영화 ‘서울의봄’ 흥행으로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된 전두환 전 대통령이 다시 여론의 도마에 올랐다.

이런 시점에서 생전 전두환 전 대통령을 40년 넘게 보좌해왔던 민정기 전 공보비서관이 지난 9일 자유기업원 초청을 받아 강연했다. 민 전 비서관은  ‘전두환 회고록’을 쓰고 정리히고 출간한 당사자다. 

민 전 비서관은 이날 강연에서 현대사의 쟁점 사건인 10.26, 5.18, 최규하와 전두환의 관계, 그리고 ‘전두환 회고록’이 출간된 과정에 대해 입을 열었다. 중요한 역사적 증언인 셈이다. 

민 전 비서관은 5.18민주화운동이란 용어가 공식화됐지만 내가 광주사태라는 말을 계속 쓰겠다고 해서 생방송 인터뷰가 파행이 된 적 있다”고 소개한 뒤 “‘사태라는 말은 어떤 사건의 성격에 관한 평가를 배제한 가치중립적인 표현이지 5.18을 폄훼하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민 전 비서관은 3년 전 전두환 전 대통령 부음 통보를 받고 연희동에 갔을때 내세가 있는지 모르지만, 다음에 다시 생을 얻어 태어나신다면 이 땅에는 오지 마십시오’ 라고 마음속으로 외쳤다”라고 자신의 심경을 전했다.

그런 심적 배경에는 “독재를 했다, 권위주의였다고 하지만 전 대통령은 추락 위기의 나라룰 구하고, 80%의 국민이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할만큼 민생을 살찌게 했고 올림픽으로 국위를 세웠는데도 그를 역사상 최악의 폭군처럼 몰아붙였다”라는 서운함과 무력감이 깔려있었다고 전했다. 

그 뒤 민 전 비서관이 “다음 생에는 이 땅에 오시지 말라고 했다”고 이순자 여사에게 전하자, 이 여사는 “오실 거예요’”라고 한마디만 했다고 한다. 

민 전 비서관은 영화 ‘서울의봄’ 소재가 됐던 10.26 사건에 대해서 “12.12는 대통령 시해 사건 이후의 혼미한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목숨을 담보하고 취한 결단”이라며 “수사관 몇 명을 보내 계엄사령관을 연행해 오는 일이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는 일이어서 그 전날 가족들을 모아놓고 유언을 남겼던 것”이라고 말했다.

민 전 비서관은 “나는 최규하 대통령의 국무총리 시절부터 대통령을 사임하실 때까지 5년 가까이 그 분의 비서관으로서 12.12, 5.18과 최 대통령의 사임이라는 정치적 격변을 청와대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며 “최 대통령이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후임을 맡아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한 것은 기성 정치지도자들에게는 추락할 위기에 처한 나라를 맡길 수 없다는 그분 나름의 고심에서 나온 결심”이라고 말했다.

이어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최규하 대통령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라는 해석이 정설처럼 되어 있지만 그것은 억측일 뿐”이라며 “최 대통령이 사임하고 그 자리를 맡게 되는 과정이 짧은 기간에 밀실에서 이루어졌고, 또 그즈음 최 대통령을 둘러싼 분위기가 우울했던 것은 사실이니까 최 대통령을 밀어내기 위해 권총으로 위협했다는 만화 같은 얘기까지 상상력을 동원한 온갖 억측들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본지는 그의 강연록 전문을 입수해 소개한다. 현재로는 그의 강연 내용에 동의하지 않을 이들이 더 많겠지만,  훗날 역사의 심판에 맡기고자 한다. 

전두환회고록광주사태

오늘 자유기업원의 회원 여러분이 새해를 맞아 인사를 나누고 희망찬 덕담을 교환하시는 자리에 제가 나와서 지나간 얘기, 그것도 어두웠던 과거사에 대해 말씀을 드린다는게 망설여지는 일이었지만, 5.18문제와 관련해서 화해 상생이라는 밝은 주제로 말씀을 해달라는 뜻이어서 나오게 됐다.

오늘 저를 이 자리에 나오라고 한 것은 全斗煥 대통령이 돌아가시고 안계신 상황에서 제가 全斗煥 대통령의 입장과 생각을 대변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인정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청와대 비서관 시절을 포함해서 全斗煥 대통령 퇴임 후까지 40년 넘게 측근에서 보좌해 온 것이 사실이다.

全斗煥 대통령이 인생 말년에 일생을 회고하며 펴낸 전두환회고록도 제가 책임지고 출간했다. 19백페이지에 달하는 회고록의 원고를 제가 1페이지부터 다 쓴 것은 물론 아니다. 全斗煥 대통령은 퇴임후 회고록을 펴낸다는 생각을 재임 중 몇 차례 밝히신 바 있고, 누구나 알만한 저명한 작가 두 명에게 그 일에 관해 구체적인 준비까지 맡겨놓았는데 그 작업이 진척이 안된 것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퇴임후 ‘5공청산’, ‘백담사’. 국회청문회, 5.18특별법에 따른 투옥 등으로 회고록을 준비할 사정이 되지 못했고, 그 두 분 역시 각자 작품활동하느라 全斗煥 대통령 회고록 문제는 잊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회고록 준비하면서 그 두분을 다 만나봤다.(그 뒤 한 분은 작고) 全斗煥 대통령은 2000년경부터 주위의 측근들에게 구술하면서 회고록 준비를 했다. 그즈음 나는 대학 두 곳에 출강하고 있어서 그 일에 참여하지는 않았는데, 훗날 내가 그 일에 참여할 때까지 출생부터 군시절까지 얘기, 그리고 12.12 같이 全斗煥 대통령이 직접 경험했던 일들에 관한 구술 녹취록이 만들어져 있었다.

2010년경 全斗煥 대통령은 민수석은(全斗煥 대통령은 평소 나를 그렇게 불렀다) 내 머릿속에 들어 앉아 있는 것 같다. 나보다 내 생각을 더 잘 알고 더 잘 표현해 낸다면서 회고록 작가를 멀리서 찾을 이유가 없다며 회고록 출간의 책임을 맡기셨다. 그러니까 제 말이 全斗煥 대통령의 육성 그 자체는 아니라 하더라도 全斗煥 대통령의 입장과 생각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全斗煥 대통령은 평소 말씀하실 때에도 5.18을 광주사태라고 했고, 회고록에서도 그렇게 표기했다

몇 년전 어느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의 앵커와 인터뷰를 했다. 그 뉴스프로에는 전에도 몇 번 전화녹음 인터뷰에 응한 일이 있는데 내 말을 편집해서 내보내는 내용이 마음에 안들어 그날은 생방송 아니면 안한다고 한 끝에 생방송으로 인터뷰했다. 생방송 도중 그 프로의 앵커가 내 말에 이의를 달고 내가 반론을 하고 하는 바람에 인터뷰가 파행했다. 앵커는 내가 19805월 광주에서 발생했던 상황을 광주사태라고 말하자 ‘5.18민주화운동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의를 줬다. 나는 金泳三정부의 5.18특별법 이래 ‘5.18민주화운동이란 용어가 공식화됐고 ‘5.18민주화운동을 폄훼하면 처벌한다는 법이 만들어진 것은 알고 있지만, ‘사태라는 말은 어떤 사건의 성격에 관한 평가를 배제한 가치중립적인 표현이고, 광주사태라는 말이 5.18을 폄훼하하는 것도 아니니까 나는 광주사태라는 말을 계속 쓰겠다고 반론을 해서 생방송 인터뷰가 파행이 되고 말았다.

전두환회고록에 대한 출판판매가처분신청때에도 여러 대목을 삭제해야 한다고 지적했지만 광주사태라는 표현 자체를 문제삼지는 않았다. 나는 역사적 사건의 성격이나 평가에 관해 법이나 권력, 집단주의적 압력으로 강제하려는 태도는 옳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광주사태라는 말을 쓰겠다.

사실 ‘폭동’이란 말도 마찬가지다. 어떤 일이 벌어졌었나 하는 사건의 양상에 관한 표현이지 사건의 성격에 관해 평가하는 표현이 아니다. 정치학 서적이나 역사책에서도 가치판단을 동반하지 않는 내용에서 폭동이란 표현을 쓴다. 1985년 북한노동당이 펴낸 출판물도 광주의 무장시위대를 폭동군중이라는 말을 썼다. 폭동이란 말에 부정적인 의미를 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오늘 내가 광주사태라고 하는 것이 듣기에 불편하더라도 양해해 주기 바란다.

5.18문제와 화해 상생 국가적 과제

지난주 어느 정치인(이재명-편집자 주)에 대한 테러사건을 계기로 화해와 상생, 관용과 포용, 대화와 타협이라는 말이 정치 사회적 화두가 되고 있다. 이 사건은 우발적이라기보다 우리 사회 심층에 퍼져 있는 집단 진영 세력간의 대립이 증오와 분노를 넘어 상대에 대한 타도 척결로 치닫고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공존 공생을 거부하는 좌우 양진영의 배타적 대결로 테러가 빈발했던 해방정국 상황이 재연되고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화해와 상생은 이제 사회적 화두에 그치지 않고 시대적 국가적 과제가 되고 있다.

5.18문제와 관련해서도 화해와 용서라는 말과 함께 무엇보다도 全斗煥 대통령 측의 사죄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全斗煥 대통령 입장에서는 사실 화해, ‘상생이니 하는 말 자체가 사치스러운 용어다. 화해나 상생은 서로 대치 대립하는 진영 세력간의 관계에서 성립할 수 있는 말인데 全斗煥 대통령은 퇴임후 그 혹독한 공격과 박해와 모멸을 받으면서도 세력을 형성하거나 진영을 갖춰 대항한 일이 없다. 5공세력이란 것은 全斗煥 대통령의 퇴임에 즈음해서부터 불어닥친 ‘5공청산태풍 속에 사라져 버렸다. 全斗煥 대통령이 백담사에 유폐되어 있던 시절에는 백담사측’, 그 뒤로는 ‘연희동측’이라고 부르기는 했지만, 백담사, 연희동을 지키는 세력이나 집단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全斗煥 대통령의 사저를 지키고 있는 것은 경호병력 몇 명뿐이었다.

全斗煥 대통령이 돌아가신지 새해들어 햇수로 3년이 됐다.

그날 아침 나는 전화를 받고 연희동으로 달려갔는데 가는 도중 아무런 생각도,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도착해서 내실 침대에 편한 모습으로 누워 계신 그분 앞에 섰지만 슬프다는 느낌도 없었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내세가 있는지 모르지만, 다음에 다시 생을 얻어 태어나신다면 이 땅에는 오지 마십시오마음속으로 그렇게 외쳤을 뿐이다. 그 시간 내 심경은 이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잘 가셨다, 이제 이런 나라, 이런 국민과의 인연이 끊어졌으니 잘됐다. (누구처럼) 바위에서 뛰어내린 것도 아니고, 고통없이 천수를 누리고 가셨으니 잘 가셨다, 새 세상에서는 편한 생을 누리십시오’ , 그런 심경에서 내세에는 이 땅에 다시 오시지 말라고 마음 속으로 외쳤던 것 같다. 훗날 李順子 여사에게 이 일을 말씀드렸더니 李順子 여사는 오실 거예요한마디만 하셨다.

全斗煥 대통령에 대해서 나쁘게만 말하는 사람들도 재임중에 이루어 놓은 업적에 대해서는 부인하지 못한다. 그러나 쿠데타와 광주의 비극을 통해 집권했다는 사실은 그 어떠한 공적하곧 상쇄할 수 없는 역사적 죄악이기 때문에 용서할 수 없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12.125.18에 관해 길게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그 두 사건이 결코 대통령이 되기 위해 획책한 일은 아니다. 12.12는 대통령 시해 사건 이후의 혼미한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목숨을 담보하고 취한 결단이었다. 수사관 몇 명을 보내 계엄사령관을 연행해 오는 일이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는 일이어서 그 전날 가족들을 모아놓고 유언을 남겼던 것이다.

崔圭夏 대통령이 사임하면서 그 뒤를 맡아달라고 했을 때에도 기다렸다는 듯이 콧노래를 부르며 달려간 것이 아니다. 10.26 후 정치 사회적으로 불안정했고 경제는 30%대의 인플레와 마이너스 6% 성장의 파국적 상황이었다. 훗날 경제부총리를 지낸 강경식 경제기획원차관보는 회고록에서 당시의 경제상황이 조종사가 없는 비행기가 계속 고도가 떨어져 가고 있는 상황 같았다고 회고했는데, 대통령이 되어 그 상황을 수습하지 못하면 18년 장기집권 적폐의 책임까지 떠안게 되어 나라를 망친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게 될 형편이었다.

12.12 이후 군부실권자가 된 全斗煥 보안사령관이 대통령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라는 해석이 정설처럼 되어 있지만 그것은 억측일 뿐이다. 대통령이 사임하고 그 자리를 맡게 되는 과정이 짧은 기간에 밀실에서 이루어졌고, 또 그즈음 대통령을 둘러싼 분위기가 우울했던 것은 사실이니까 대통령을 밀어내기 위해 권총으로 위협했다는 만화 같은 얘기까지 상상력을 동원한 온갖 억측들이 있는 것 같다. 그때 대통령의 심기가 불편했단 것은 全斗煥 보안사령관측으로부터 사퇴 압력을 받아서가 아니라. 당시 나라 형편이 매우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대통령의 국무총리 시절부터 대통령을 사임하실 때까지 5년 가까이 그 분의 비서관으로서 12.12, 5.18대통령의 사임이라는 정치적 격변을 청와대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대통령이 잘 알려진 정치지도자들을 제쳐놓고, 全斗煥 보안사령관에게 후임을 맡아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하신 것은 기성 정치지도자들에게는 추락할 위기에 처한 나라를 맡길 수 없다는 그분 나름의 고심에서 나온 결심이었을 것이다. 그 얘기를 길게 할 자리가 아니지만, 대통령에서 물러난 뒤 두 분의 관계를 보면 대통령 자리에서 쫓겨난 사람과 쫓아낸 사람 사이에서는 있을 수 없는 관계를 유지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국정을 책임지는 자리를 맡게 된 全斗煥 대통령은 밤낮없이 공부하고, 전국방방곡곡을 찾아가 국민의 생활형편을 살피고, 공직자와 기업인들을 독려해서 임기중 선진국 도약의 토대를 확고히 다져 놓았을 뿐만 아니라 단임을 실천함으로써 평화적 정권이양의 선례를 만들어 놓고 퇴임한 것이다.

그런데 청와대를 나온 뒤 돌아가실 때까지 30여년간 이 나라, 이 나라 국민은 그 어른에게 무엇을 보여주었는가. 이 나라, 이 국민에게 全斗煥이란 존재는 끊임없이 돌을 던지고 욕설을 퍼붓고 침을 뱉을 목표물에 지나지 않았다. 정치적으로는 물론 법적으로나 국민감정상 全斗煥이란 인물은 더 이상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 아니었다. 독재를 했다, 권위주의였다고 하지만, 독재를 하고 권위주의 통치를 해서 국민이 못살게 되고 나라가 망하기라도 했는가. 추락 위기의 나라룰 구하고, 80%의 국민이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할만큼 민생을 살찌게 했고 올림픽으로 국위를 세웠지 않은가. 그러나 이 나라는, 이 국민은 그를 우리 역사상 최악의 폭군처럼 몰아붙였다. 全斗煥 대통령은 퇴임 후 33년간 그런 세월을 보낸 뒤 아무 말씀도 남기지 않으신 채 이 나라, 이 국민에게 하직을 고한 것이다. 그 하직의 자리에서 나는 다시는 이 땅에 오지마시라고 가슴속으로 외친 것이다.

내 이야기를 듣고 李順子 여사가 한마디로 오실 거예요’ 하신 것은 全斗煥 대통령이 다시 그시절로 돌아간다해도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일, 국민 모두가 번듯한 생활을 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밤낮을 잊고 헌신했던 일, 그로 인해 퇴임 후 30여년간 그 모진 공격과 핍박과 모멸까지도 다 견뎌내셔야 했던 일, 그 모든 행로를 피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일 것이다. 시인 청마 유치환은 너에게라는 시에서 ‘…운명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피할 수 있는 것을 피하지 않는 것이라고 읊었다. 그렇다. 全斗煥 대통령은 피할 수가 없어서가 아니라 피할 수는 있지만 운명이라 여기며 국가와 국민을 위한 길을 걸어가신 것이다.

5.18의 책임과 사죄

청와대를 나온 뒤 33년간은 물론 돌아가신 뒤까지 全斗煥 대통령을 옥죄는 것은 사죄라는 올가미다. 돌아가셨다는 뉴스 뒤에 따라붙는 논평들은 끝내 사죄의 말도 없었다는 것이었고 파주(坡州)에 장지를 구한다는 데 반대한다면서 사죄도 없었는데..’라는 이유를 댔다.

광주사태는 그 실상이 어떠했고 그 원인이 어디에 있건간에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불행한 사건임이 분명하고 희생이 컸던만큼 그 원인을 밝히고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5.18사태가 수습된 뒤 1백일쯤 지난 1980816일 최규하 대통령은 광주사태에 대해 국정의 최고책임자로서 정치도의상의 책임을 통감해왔다면서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직접적인 책임이 없는 사건과 관련해서 대통령직을 사임하는 것은 책임을 지는 조치로서는 가장 엄중한 일이 이닐 수 없다. 사임한 대통령이 국정의 최고책임자인 동시에 국군통수권자였다면, 그 당시 계엄령하에서 군최고지휘관은 이희성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이었다. 이희성 사령관은 2013년과 2016년 동아일보, 조선일보와 각각 가진 인터뷰에서 5.18全斗煥 보안사령관이 계엄군의 출동과 발포명령을 배후 조종했다는 의혹에 대해 그건 군의 작전지휘계통을 정말 모르고 하는 소리라면서 광주에 관한 한 全斗煥은 책임이 없다고 분명히 밝혔다. 5.18 책임문제에 全斗煥 보안사령관이 지목되는 것은 광주가 수습되고 3개월 뒤 대통령이 됐기 때문이다. 대통령만 안됐으면 全斗煥 이름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런데 현실은 5.18하면 全斗煥, 全斗煥하면 5.18이 따라붙는다. 5.18全斗煥은 마치 연관어, 합성어처럼 돼 있다. ‘사죄하라는 요구가 지난 30여년간 집요하게 이어져 왔다. 그로인해 全斗煥 대통령은 2021년 돌아가실 때까지 하루도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이 안타까워서 주위에서는 ‘5.18측과 정치권에서 요구하는 대로 망월동을 방문해서 사죄의 말씀을 하시고 나머지 여생을 좀 편하게 지내시는게 어떠냐는 건의를 드리는 사람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5.18측이나 정치권에서 요구하는 사죄대통령의 퇴임성명 때와 같이 정치 도의적 책임’ ‘유감정도의 추상적 총론적 표현의 사과는 아니다, (*노재헌: 2019.8에 이어 2020.5 두 번 광주 북구 운정동 방문 조진태 5.18기념재단상임이사 사죄의 뜻 있다면 그 의미 구체적으로 밝혀야’, 김이종 5.18부상자회회장 진정성 있는 사과라고 봐야할지 의문’)

작전지휘계통에 있지도 않으면서 광주에 공수부대를 투입하도록 했고 시위대에 발포하도록 명령한데 대해 사죄하고 그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공수부대 투입과 발포명령에 全斗煥 보안사령관이 어떻게 관련돼 있는지 구체적인 사실관계를 적시하지 못하고 있다. 형사소송법에는 공소사실의 기재는 범죄의 일시, 장소와 방법 등을 명시하여 범죄사실을 특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규정하고 있다. 그러니까 全斗煥 대통령에게 사죄를 요구하려면 全斗煥 당시 보안사령관이 군의 지휘체계를 무시하고 공수부대 투입과 발포명령에 개입했다는 구체적 사실을 6하원칙에 따라 적시하고 그 근거를 제시하면서 사죄하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사실이 없었으니까 그저 사죄하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이는 마치 과거 왕조시대에 원님이 양민을 잡아다 곤장을 치면서 네 죄를 네가 알렸다고 하던 사극의 한 장면 같다고나 해야할까.

있지도 않았던 역사적 사실을 억지로 지어내 사죄하는 것은, 全斗煥 대통령 개인이 역사의 죄인이 되는데 그치지 않고, 역사를 왜곡하고, 나아가 대한민국 국군을 불법적인 명령을 받아 무고한 시민을 살상한 군대라는 누명을 씌우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결코 해서는 안될 일이다.

민정기 전 비서관.  출처 월간조선
민정기 전 비서관.  출처 월간조선

진상 규명 – ‘전두환회고록출판판매금지

30년 전 金泳三 정권은 불법선거자금모금 의혹으로 궁지에 몰리게 되자 국면 탈출을 위해 자신의 입으로 훗날의 역사에 맡기자고 했던 12.12, 5.18문제를 다시 들고 나왔다. 소급입법의 위헌적 법률인 5.18특별법에 따른 재판에서는 군사반란’ ‘내란의 유죄판결을 내렸다. 유죄라는 결론을 정해놓고 재판을 했기 때문인지 그 판결문이란 것의 문장은 참으로 요상했다. 한 구절만 인용하자면 ‘’….국헌문란계획을 달성하겠다는 목적 아래 그 목적 달성의 직접적인 수단으로 행해진 것이라 못볼 바 아닌 다음에야 강경진압 및 살해행위의 직접 목적이라 아니 볼 수 없다…“ 심지어 내란했다는 명확한 증거와 사실관계를 찾아낼 수 없으니까 외양을 보지 말고 속을 봐야 한다거나 피고인의 머리속 색깔은 다른 사람들과 달랐고 내란할 마음이 있었으니까 유죄라고 판시했다.

5.18에 관해서는 지난 40년간 여러 기관에서 여러 차례 조사에 나섰고, 특별기구들을 만들어 조사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2019년 구성된 5.18진상규명위원회가 기간을 연장해가면서까지 4년간의 조사활동을 지난 연말 마무리했다. ‘내란죄확정판결로 실형을 살게 한 뒤 다시 조사활동이 되풀이된다는 것은 실체적 진실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그동안 광주사태의 진상조사를 위해 투입된 비용만도 천문학적 액수에 달할 것이다.

실체적 진실을 밝히려면 반론도 들어봐야 하는데 아예 그 길을 봉쇄해 놓고 있다. 2017년 발간한 전두환회고록은 발간 즉시 출판판매금지 가처분신청이 받아들여져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5.18단체에 관해서는 직접 언급한 대목이 없음에도 5.18단체가 표방하는 정신과 배치되는 내용의 기술이 있다고 출판판매를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할말을 잃게 만드는 일은 김일성회고록(’세기와 더불어‘)2021년 판매금지가처분신청이 법원에서 기가각됨으로써 판매가 자유스럽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을 적화통일하겠다고 6.25를 일으켜 수백만의 국민을 살상한 金日成의 책은 마음대로 팔 수 있고 그러한 金日成의 침략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킨 전직 대통령의 책은 팔 수 없다는 것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덧붙여 말씀드리자면 얼마전 언론에 보도된 바와 같이 全斗煥 대통령의 유골을 파주에 안장하려는 계획을 파주시가 격렬하게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경기도 파주에는 6.25때 참전한 중공군과 북한인민군, 휴전후 남파됐던 무장게릴라들의 묘소가 자리잡고 있다. 全斗煥 대통령 유족의 계획에 거칠게 반대하고 있는 그곳 출신 어느 국회의원은 몇 년전 북한군묘역에서 열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군인 추모제에 참석해서 추모사를 했는데 같은날 열린서해수호의 날추모행사에는 불참했다. 이것 또한 6.25의 참화를 겪은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북한군 개입 논란

전두환회고록은 19백 페이지에 1.2.3 세권으로 되어 있는데 광주사태에 관해 170페이지에 걸쳐 서술돼 있다. 全斗煥 대통령은 물론 회고록 원고를 완성한 나도 19805光州에서 전개된 상황을 체험하거나 현장을 직접 목격한 일도 없다. 그럼에도 회고록에서 광주사태에 관해 상세히 기술한 것은 회고록에서 밝혔듯이 5.18에 관한 시비논란의 중심에는 빠지지 않고 全斗煥 대통령이 등장하기 때문에 회고록에서 이 문제를 성실하게 기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대환 의장은 전두환회고록이 북한군 개입설을 지지하는 듯한 표현이 있다고 지적했는데 북한의 개입문제에 관해서 회고록이 몇가지 정황과 개연성등을, 관련 자료와 기록들을 인용하며 자세하게 서술한 것은 사실이다. 북한의 개입은 사실이 아니다하는 주장은 북한군을 본 일이없다는 말 이외에는 더 이상 길게 설명할 일이 없으니까 회고록에서는 상대적으로 북한의 개입 의혹에 관한 기술보다 간단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 그렇다고 그런 주장을 지지했다고 해석할 수는 없다. 전두환회고록은 ’5.18사태에 북한은 어느 정도 개입했었는가 하는 문제들에 관해 이 글에서 확신을 갖고 새삼 강조할 수 있는 부분은 많지 않다‘(회고록p.530)고 밝혔다.

미전향장기수들이 다수 수감돼 있는 광주교도소에 대한 집요한 공격, 운전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 이외에는 자가운전자가 귀하던 당시 光州에서 3백여명이 방산업체로 몰려가 370여대의 군용차량과 버스를 탈취해서 몇시간만에 40개소의 무기고를 습격한 사실 등은 그들의 정체에 대해 의심을 품게 한다는 사실 등을 적시했지만, 그러한 기술이 북한군의 개입설을 지지한 것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회고록 출간되던 2017년 봄 지만원 박사가 북한군 개입 증거라며 10여건의 스모킹 건을 제시해서 논란이 벌어졌는데 그 주장 가운데 납득이 되는 대목을 소개하는 뜻으로 인용한 것이다.

현장 상황에 대한 인식

나는 5.18 현장상황을 목격한 일이 없지만, 광주사태 기간 그곳에서 직접 체험한 사람들의 얘기들을 들어보면 광주사태의 전모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광주사태 기간 중 있었던 일들의 일부를 빠뜨리거나 일부러 외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사건의 발단, 어떻게 해서 국군과 시민간에 무력충돌이 벌어지게 됐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사건의 전모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사건의 전말, 자초지종을 다 살펴봐야 하는데 초기 상황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는 것이다. 계엄군이 시위대를 진압봉으로 때리는 장면만 보여주고 얘기하지 그 일이 있기 전에 부동자세로 경계임무에 임하고 있는 계엄군 장병들에게 돌을 던져 피투성이로 만든 일은 외면하고 있다. 일정한 주둔지가 없는 기동부대인 공수부대가 전남대학교로 간 것은 작전이 아니라 주둔의 개념으로 투입된 것이다. 그래서 배구공, 바둑판, 테니스 라켓, 냉장고, tv 등을 들고 갔다. 시가지로 진출한 시위대를 쫓아가 체포하라고 한 것은 공수부대를 작전배속받은 전교사령관과 향토사단인 31사단장이었다. 그 두 사람 다 전남출신이다. 시위대를 해산시키는데 그쳤으면 큰 충돌은 없었을 것을 잡아오라니까 이미 시위대에게 투석공격을 받았던 계엄군의 행동이 거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끝)

#전두환 회고록, #서울의봄,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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