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세적 전환’ 보다는 ‘과도기’에 무게

얼리어답터向 고성능차에서 대중向 보급형차로 중심이동

기아 전기차 라인업. 왼쪽부터 EV6 GT, EV4 콘셉트, EV5, EV3 콘셉트, EV9 GT 라인. ⓒ기아 기아 전기차 라인업. 왼쪽부터 EV6 GT, EV4 콘셉트, EV5, EV3 콘셉트, EV9 GT 라인. ⓒ기아

전기차 시장 성장세가 한풀 꺾이며 완성차와 배터리 업계의 긴장감이 커지고 있다. 지난 2년간 고속성장을 배경으로 앞 다퉈 공격적 투자에 나섰지만, 시장 추세가 공급과잉으로 돌아설 경우 출혈경쟁‧재고누적으로 막대한 손실을 떠안을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업계에서는 최근의 전기차 성장 둔화를 추세적 전환이라기보다는 얼리어답터 시장에서 대중화로 전환되는 과도기에서 나타나는 ‘성장통’ 정도로 판단하고 있지만, 성장통의 기간이 얼마나 길어질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13일 업계에 따르면 그동안 공격적 투자로 손발을 맞춰 오던 글로벌 완성차와 배터리 기업들은 최근 들어 합작공장 건설 시기를 늦추거나 철회하는 등 속도조절에 나서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포드의 튀르키예 배터리 합작공장 투자 철회가 대표적 사례다. 이들의 튀르키예 현지 투자 파트너였던 코치 그룹은 지난 11일(현지시간) 합작법인 설립을 위한 3자 양해각서(MOU)를 철회한다고 공시했다.

이와 관련, LG에너지솔루션은 “현재 소비자들의 EV 전환 속도를 고려했을 때 튀르키예에 건설 예정이던 배터리셀 생산시설에 대한 투자를 지속하기에 적절한 시기가 아니라는 것에 상호 동의했다”고 설명했다.

다만 포드의 기존 상용차 EV 관련 계획은 그대로 진행될 예정이며, LG에너지솔루션은 기존 생산시설에서 배터리셀을 공급할 계획이다.

앞서 폭스바겐그룹도 동유럽 지역에 4번째 배터리 생산공장을 지으려던 계획을 연기한다고 최근 발표했다.

미국에서는 포드와 SK온의 미국 켄터키 2공장 가동이 미뤄졌다. 포드가 당초 계획한 전기차 투자액 중 120억달러(약 16조2600억원)를 축소키로 한 데 따른 것이다.

업계에서는 당분간 지난 2년과 같은 전기차 시장 고성장은 나타나기 힘들 것으로 보고 있다. 전기차 소비 트렌드 자체가 ‘신기하고 폼나는 차’에서 ‘실생활에 유용한 차’로 전환되고 있기 때문이다.

테슬라 모델 S. ⓒ테슬라코리아 테슬라 모델 S. ⓒ테슬라코리아

전기차 시장의 본격적인 개화를 이끌고 지금까지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테슬라의 전략을 살펴보면 전기차 시장의 트렌드 변화를 알 수 있다.

테슬라의 시장 공략 선봉을 맡은 모델은 모델S였다. 8기통 내연기관 스포츠카 못지않은 가속성능을 발휘하는 고성능 전기차다. 이후로는 럭셔리한 공간을 제공하는 대형 전기 SUV 모델X가 주력 역할을 했다.


모델S와 모델X 모두 억대 가격이었지만, 주머니 사정이 넉넉한 얼리어답터들은 기존 완성차 럭셔리 브랜드의 내연기관차 대신 테슬라를 선택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선수를 빼앗긴 레거시 완성차 업체들도 부랴부랴 테슬라의 전략을 따랐다. 메르세데스-벤츠와 BMW 등 럭셔리 브랜드는 잇달아 고가의 고성능 전기차들을 내놨고, 폭스바겐그룹도 전기차 전략에 있어 대중차 브랜드 폭스바겐보다는 럭셔리 브랜드 아우디에 더 무게를 뒀다.

대중형 전기차 모델 쉐보레 볼트 EV로 나름 전기차 시장에서 입지를 구축했던 제너럴모터스(GM)도 쉐보레 상위 차급과 럭셔리 브랜드 캐딜락, GMC의 전기차 모델들을 서둘러 개발했다.

과거 소형, 경형 위주로 전기차를 내놓던 현대차그룹도 2021년 전기차 전용 플랫폼 E-GMP를 장착한 첫 모델로 현대차 아이오닉 5와 기아 EV6 등 준중형 이상의 차급을 선택한 이후 그보다 상위 차급의 고가 라인업을 잇달아 출시했다.

테슬라 모델3. ⓒ테슬라코리아 테슬라 모델3. ⓒ테슬라코리아

하지만 그동안 전기차 시장의 쾌속 성장을 견인했던 얼리어답터 수요가 상당부분 충족되면서 시장 상황은 달라졌다. 앞으로 시장 규모를 더 확대하려면 대중차 시장을 공략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모델S와 모델X를 통해 앞서가는 이미지와 럭셔리 브랜드 파워를 장착한 테슬라는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대량생산체제를 구축하면서 모델3, 모델 Y와 같이 가격 장벽을 낮춘 모델을 주력으로 삼기 시작했다. 배터리도 저가 전기차의 상징과 같은 LFP(리튬인산철) 배터리를 사용한다.

다른 완성차 업체들도 태세 전환은 불가피한 모습이다. 대중차와 럭셔리 브랜드 막론하고 LFP 배터리 기반의 보급형 전기차들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현대차그룹 역시 한동안 방치해 뒀던 비(非) E-GMP 모델들을 다시 꺼내들었다. 현대차 코나 EV, 기아 니로 EV, 레이 EV 등의 모델체인지와 함께 LFP 배터리를 장착해 주머니가 가벼운 소비자 공략에 나섰다.

다만 유행처럼 빠르게 번지는 얼리어답터 시장과 달리 대중 소비자 공략은 상당한 인내가 필요한 일이다. 충전 인프라와 여전히 내연기관차보다 높은 가격 등은 보급형 전기차들이 넘어야 할 장벽이다.

서강현 현대자동차 기획재경본부장(부사장)은 26일 3분기 실적발표 컨퍼런스콜에서 “산업 패러다임이 변화할 때 제조사들은 리니어하게 계획을 짜지만 실제로는 약간 계단식으로 변하는 게 보통”이라며 “전기차 시장이 충전 인프라와 가격 부담 등 얼리어답터에서 일반 소비자로 가는 과정에서 제약 요인이 발생하는 걸로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대차 울산공장 아이오닉 5 생산 라인. ⓒ현대차그룹 현대차 울산공장 아이오닉 5 생산 라인. ⓒ현대차그룹

다만 중장기적 시각으로 보면 전기차 전환이 피할 수 없는 대세라는 데는 완성차나 배터리 업게 모두 인식을 같이 하고 있다. 최근 전기차 시장 움직임도 과거와 같은 성장속도를 보이지 못할 뿐이지 성장이 멈추거나 마이너스로 돌아선 것은 아니다.

특히 전기차 보급 확대를 위한 국가별 지원정책에 따라 시장 상황은 언제든 변할 수 있다. 전기차 지원 정책에서 다소 주춤한 중국, 유럽과 달리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을 앞세워 공격적 전동화 전략을 추진 중인 미국은 여전히 고성장세를 구가한다.

미국 시장조사업체 익스페리언에 따르면 올 들어 9월까지(1~3분기) 미국 내 전기차 등록 대수는 85만2904대로, 전년 동기 대비 61%나 증가했다. 전체 자동차 등록 대수에서 전기차가 차지하는 비중도 5.2%에서 7.4%로 2.2%포인트 확대됐다.

완성차 업계 한 관계자는 “전기차가 대중 시장에 파고드는 과도기로 짧게는 수 개월, 길면 1년여 정도 보고 있지만, 일단 과도기를 거치고 인프라 확대와 전기차 보급 확대가 상호 작용하는 선순환이 이뤄진다면 다시 폭발적 성장이 이뤄질 것”이라며 “그 과도기를 어떻게 현명하게 버티느냐의 문제지 전기차와 배터리에 대한 투자 자체를 재검토할 문제는 아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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