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프로야구는 1982년 출범한 이래 수많은 스타를 배출했다. 그 중 최고의 선수가 누구인지 쉽게 말할 수 없지만 최동원의 이름을 빼 놓고 한국 프로야구를 말할 수는 없다.

최동원은 1983년 프로에 데뷔한 뒤 8시즌 동안 통산 103승 74패 26세이브를 기록한 투수다. 통산 방어율 2.46과 1,019개의 탈삼진을 기록했다.

그러나 그는 통산기록 부문에서 10위권 안에 드는 것이 거의 없는 투수이기도 하다. 하지만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가을의 기적’을 만들며 부산야구의 신적인 존재가 됐다

최동원은 7전4선승제의 한국시리즈에서 혼자 4승을 따내며 약체 롯데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1984년 한국시리즈보다 더 극적인 승부는 아마도 한국 프로야구에서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최동원은 1차전과 3차전에서 각각 9이닝 7안타 완봉승(롯데 4-0 삼성), 9이닝 6안타 2실점으로 완투승(롯데 3-2 삼성)을 기록했다.

5차전에서는 8이닝 6안타 2실점으로 호투했지만 롯데가 2-3으로 졌다. 최동원은 이 경기에서도 완투했다. 강감독은 6차전 5회에 최동원을 구원 투수로 기용해 6-1로 승리하며 시리즈를 최종전으로 끌고 갔다.

7차전에도 마운드에 오른 최동원도 가벼운 마음으로 공을 뿌렸다. 경기 초반 4점을 내줬지만 8회초 롯데 공격에서 유두열이 6차전까지의 부진(17타수 1안타)을 말끔히 씻어 내는 3점포를 쏘아 올렸고 경기는 6-4로 뒤집으며 기적같은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한국시리즈에서만 40이닝을 던지며 4승을 올린 최동원은 타격 3관왕을 차지한 삼성 이만수를 제치고 정규 시즌 최우수선수로 뽑히며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1981년 메이저리그 구단과 성사 직전까지 갔던 두 번째 기회가 더 클 것이다. 최동원은 1981년 캐나다에서 열린 대륙간컵 대회에서 캐나다를 상대로 8회까지 퍼펙트 게임을 기록하는 등 호투를 펼치며 대회 최우수선수로 뽑혔다.

최동원의 투구 내용을 높게 평가한 메이저리그 구단들의 입단 제의가 이어졌고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연봉 61만 달러에 계약을 맺었지만 병역문제가 해결되지 못해 최동원의 해외 진출 꿈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이후 1985년 20승, 1986년 19승, 1987년 14승을 올리며 당대 최고 투수로서의 명성을 이어갔다.

하지만 1988년 선수들의 권익보호를 위해 선수협의회 결성 문제로 삼성 라이온즈로 트레이드되기도 했다. 트레이드 이후 의욕을 잃어 침체기를 맞게 되었고, 1990년 화려한 선수생활을 뒤로하고 은퇴했다.

8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프로 생활을 마치기까지 그는 총 248경기에 등판하여 1414.2이닝을 소화하고, 103승 26세이브 74패, 1019 탈삼진, 평균자책점 2.46이라는 좋은 기록을 세웠으며, 무려 80경기를 완투(완봉 15경기)했다.

한국 프로야구 30년 역사에서 가장 막강한 구위를 자랑한 최고의 에이스로, 트레이드마크인 금테 안경을 끼고 마운드에 올랐다. 주무기는 150km/h에 육박하는 직구와 낙차 큰 커브였다. 아마추어 시절부터 단련된 연투 능력으로 인해 ‘무쇠팔’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 1977~1978년 국가대표 시절에는 거의 매 경기 마운드에 등판했고, 1983년부터 1987년까지 5년 연속 200이닝 이상을 투구했을 정도로, 이닝 소화능력이 출중했다.

은퇴 이후 지방의원 선거에 출마해 낙선하기도 했으며, 방송사 해설위원, 방송인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2001년 은퇴한 지 10년만에 그라운드로 돌아와 한화 이글스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고, 2007년 한화 2군 감독이 되었다.
2009년부터 한국야구위원회 경기감독관으로 활동했으나 2007년 진단을 받은 대장암으로 2011년 9월 세상을 떠났다. 친정팀인 롯데 자이언츠는 선수 시절 그의 등번호 11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최동원 투구폼

영화 퍼펙트 게임에서 최동원역을 맡은 조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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