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17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회계부정·부당합병 관련 1심 결심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황재희 기자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사진=황재희 기자

[데일리임팩트 변윤재 기자] “다들 열심히 하고 계신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27일 귀국길에서 이 같이 말했다. 감기로 목이 쉰 이 회장은 2030 세계박람회(엑스포) 부산 유치를 위해 총력전에 나섰음을 전했다. 

이 회장은 지난 19일부터 일주일 간 유럽에 머물렀다. 윤석열 대통령 순방에 동행, 영국에서 경제사절단으로 역할했다. 이어 프랑스로 건너가 국제박람회기구(BIE) 회원국 주요 인사를 대상으로 ‘투표’를 호소했다.  

그러나 언론과 재계의 관심은 이 회장의 엑스포 총력전이 아닌 ‘인사’에 가 있었다. 이날 삼성전자는 2024년도 사장단 인사를 단행한 터. 이 회장은 사장단 인사와 관련해서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최고 결정권자의 ‘침묵’은 삼성이 처한 상황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뉴삼성의 불확실성이다.  

예년의 절반 수준…역대급 ‘소규모’ 인사

삼성전자는 이날 사장단 인사를 발표했다. 용석우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장(부사장)과 김원경 DX부문 경영지원실 글로벌공공업무팀장(부사장)이 나란히 사장으로 영전했다.

3명에 대해서는 업무 조정이 이뤄졌다. 전영현 삼성SDI 이사회 의장(부회장)은 삼성전자에 신설되는 미래사업기획단을 이끌게 됐다. 한종희 DX부문장(부회장)은 TV를 제외하고 생활가전, 모바일 사업만 담당하기로 했다. 경계현 DS부문장(사장)은 반도체 외에 SAIT(옛 종합기술원)원장까지 맡았다. 

이번 인사는 매우 보수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2020년 4명, 2021년 3명, 2022년 6명, 2023년 7명 등 삼성전자는 승진자를 늘려왔다. 핵심 사업의 미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올해는 승진 규모가 대폭 줄어 단 2명에 그친다. 재계 관계자는 데일리임팩트에 “삼성전자는 상벌이 분명한 조직”이라며 “인사, 성과급 등을 통해 구성원들에게 확실한 ‘보상’을 약속함으로써 동기를 부여해왔는데 올해는 그렇지 않았다. 조직에 ‘변화’를 주기에는 부담스러울 것이라는 판단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왼쪽부터) 한종희 대표이사 부회장과 경계현 대표이사 사장이 3일 공동 명의로 신년사를 내고. “가치 있는 고객경험으로 사업품격 높이자”고 당부했다. 사진. 삼성전자.
(왼쪽부터) 한종희 부회장과 경계현 사장. /사진=삼성전자.

인사를 앞두고 재계에서는 여러 설이 흘러나왔다. 그중 하나는 경계 사장의 경질이다. 고대역폭(HBM)메모리 시장에서 SK하이닉스에 주도권을 내줬을 뿐만 아니라 마이크론을 비롯한 경쟁업체들과의 반도체 기술 격차도 줄어들고 있어서다. 200단 이상 낸드플래시의 경우 SK 하이닉스, 마이크론이 선수쳤다. 최근에는 중국업체까지 위협적으로 맹추격 중이다.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에서도 TSMC와의 격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분위기 환기와 현금창출원, 모바일 사업 강화를 위해 노태문 MX사업부장(사장)을 대표이사로 선임할 것이라는 관측도 제기됐다. 삼성전자는 김기남·김현석·고동진의 3인 체제를 유지하다가 2021년 말 인사를 통해 현재의 2인 체제로 변경됐다. 

통합 컨트롤타워의 부활을 예상하는 시각도 있었다. 삼성전자는 2022년 인수합병(M&A)에 나서겠다고 선언한 이후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다. 경쟁사들이 M&A, 전략적 지분투자를 통해 미래 기술을 확보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사업지원TF를 확대해 과거 미래전략실(미전실)에 준하는 전사 컨트롤타워를 설립할 것이라는 관측이 꾸준히 나왔다. 

실제 인사는 ‘설’과 거리가 있었다. 리더십 교체는 이뤄지지 않았다. 한종희-경계현의 2인 체제는 내년까지 유지된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데일리임팩트에 “2인 대표이사 체제를 유지하여 경영안정을 도모하는 동시에 핵심 사업의 경쟁력 강화, 세상에 없는 기술 개발 등 지속성장 가능한 기반을 구축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혁신’의 삼성전자, 이번엔 ‘안정’ 무게 

변화를 최소화한 다소 이례적이다. 삼성전자는 세계 초일류 기술 구현을 지항하는 까닭에 혁신에 방점을 찍어왔다. 의사 결정에 영향을 줄 핵심 경영진을 유임시켜 체제 안정을 꾀한 정도로 삼성전자가 불확실성에 노출돼 있다는 의미다. 

글로벌 경기 불확실성이 지속되는 가운데 이 회장의 사법리스크가 향후 수년 간은 더 이어질 가능성이 점쳐진다. 삼성물산·제일모직 불법 합병 의혹 재판이 내년 초에는 결론을 짓는다. 3년여간 이 회장 측과 검찰은 치열한 법리 공방을 펼쳤고, 지난 17일 검찰은 이 회장에게 징역 5년에 벌금 5억원을 구형했다. 법조계에서는 이 회장이 최종적으로 집행유예를 받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지만 문제는 검찰이 이에 불복, 항소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 회장의 사법리스크가 더 길어지면, 총수체제에 기반한 삼성의 리더십에도 균열이 갈 수밖에 없다. 혁신보다 안정에 무게를 실은 이유다. 

실제 박학규 최고재무책임자(CFO·사장), 노태문 사장 등 이사회 사내이사들도 자리를 지켰다. 부정적 여론을 자극할 수 있는 통합 컨트롤타워는 이번에도 설립되지 않았다. 정현호 사업지원TF팀장(부회장)은 자리를 지켰으나, 조직 개편은 이뤄지지 않았다. 

(왼쪽부터) 용석우 삼성전자 DX부문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장, 김원경 삼성전자 글로벌공공업무팀장. /사진=삼성전자.

다만 성과주의는 엄격히 적용됐다. 실적이 좋지 않았던 DS부문에서는 단 한 명의 승진자도 없었던 데 반해 전 세계 시장 1위를 수성 중인 TV 사업에서만 승진자가 배출됐다. 지난해 DS부문에서만 4명의 신임 사장이 탄생했던 것과 판이하다. 

세대교체 역시 지속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삼성전자는 전무·부사장 직급을 부사장으로 통일하고, 직급별 체류 연한을 없애 차기 경영리더들의 책임과 권한을 동시에 강화했다. 사장단 교체와 실리콘밸리식 문화 이식을 꾀하기 위함이다. 올해 40대 사장이 탄생할 것이라는 예상이 있었으나 빗나갔다. 대신 1970년생을 사장단에 합류시킴으로써 60대 이상 물갈이를 예고했다. 

특히 ‘전문 역량’을 지닌 인재에게 기회를 주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용석우 사장은 TV 개발 전문가로 지난해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 부사업부장에 발탁됐다가 1년 만에 사업부장으로 승진했다. 기술, 영업, 전략에서 능력을 입증했다. 김원경 사장은 외교통상부 통상전략과장 출신으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기획단 협상총괄팀장, 통상교섭본부장 보좌관, 주미대사관 경제과 참사관 등을 거친 국제통상 전문가다. 2012년 3월 삼성전자 입사 후 대외협력 관계 구축에 기여했다. 

기존 사업 경쟁력을 보완하는 인사가 이뤄졌지만, 미래 신사업 발굴에 대한 의지를 함께 드러냈다. 경 사장에게 SAIT원을 맡긴 게 대표적이다. SAIT는 중장기 미래 신기술을 연구개발(R&D)을 주도하고 있다. 반도체 사업수장에게 R&D까지 맡긴 것은 ‘초격차’에 대한 주문으로 해석된다. 

미래먹거리 발굴 속도 또한 가속화될 전망이다. 삼성전자는 미래사업기획단을 신설한다. 미래사업기획단은 기존 사업의 연장선상에 있지 않은 신사업 발굴, 특히 삼성의 10년 후 패러다임을 전환할 미래 먹거리 발굴을 주도하게 된다. 

전 부회장이 통솔하는 만큼, 무게감이 남다르다. 전 부회장은 그룹 내에서도 손꼽이는 반도체 전문가다. 2000년부터 삼성전자 DS부문에서 4세대 64단 3D 낸드와 같은 신기술 양산에 성공하며 전 세계 메모리 1위 달성에 기여했다. 반도체, 배터리와 같은 핵심 사업 이해도가 높은 전 부회장에게 성장동력 확보를 맡긴 것은 시너지를 낼 만한 M&A에 나서라는 특명이다. 삼성전자가 당장 동원할 수 있는 현금이 80조원 가량, M&A 숏리스트를 추려 내년 안에는 가시적 논의가 이뤄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호시절, 장담키 어렵다’ 위기감 표출

이번 인사는 의미삼장하다. 삼성전자는 일관된 메시지를 전달해왔다. 기술과 제조공정, 브랜드 마케팅, 연구개발 분야에서 지배력을 강화하는 데 일조한 인물들에게 기회를 줬다. ‘성과 없이 승진도 없다’는 점을 환기시킨 셈이다. 이 회장의 의지에서 비롯된 결과다. 

이 회장은 초격차 기술을 강조하며 산업 간 경계를 뛰어넘는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모색해왔다. “냉혹한 현실”이라는 말로 위기감을 드러냈던 이 회장은 삼성전자의 지속가능성은 소프트파워를 바꿀 때 담보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19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기흥캠퍼스의 차세대 반도체 R&D 단지 건설 현장을 점검하고 있다. /사진=삼성전자. 
19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기흥캠퍼스의 차세대 반도체 R&D 단지 건설 현장을 점검하고 있다. /사진=삼성전자. 

2021년 이 회장은 조직의 활력과 역동성을 제고하는 인사를 단행했다. 50대 경영진은 물론, 30·40대 기수들이 전진 배치됐다. 부사장 승진자 수를 2배 이상 늘렸는데, 그 중 15%가 40대 기수였다. 5년 내 가장 많은 외국인·여성인재가 승진 명단에 이름을 올렸고, 삼성전기로 자리를 옮겼던 경계현 사장을 불러들이는 이례적 장면도 연출됐다. 재계 상위 그룹들이 안정 속 혁신을 꾀한 것과 상반된 선택이었다. 세계적 탑 브랜드에 걸맞게 실력과 성장잠재력을 입증한 인재에 기회를 줌으로써 환골탈태 수준의 변화를 유도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하지만 올해는 기술 리더십이나 사업 역량보다는 위기 관리에 초점을 맞춘 점이 눈에 띈다. 미래사업기획단도 통합 컨트롤타워의 부재를 메우기 위한 선택에 가깝다. 

인사 시기를 앞당긴 것도 위기 관리와 궤를 같이 한다. 삼성전자는 12월 초 인사를 실시해왔는데, 올해는 일주일 가량 빨리 진행됐다. 사장단과 임원 인사 이후 새해 재무 목표와 경영 전략을 논의하는 글로벌 회의가 열린다. 조기 인사는 삼성전자의 경영 시계가 앞당겨졌음을 의미한다. 

올해는 이재용 체제의 원년. 회장 승진의 당위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라도 경영 성과와 미래 성장 동력, 양쪽에서 결과물을 도출해야 했지만 만족스럽지 못했다. 재계 또다른 관계자는 데일리임팩트에 “대내외 변수, 무엇보다 반도체 업황의 영향을 무시할 순 없다”면서도 “다만 삼성의 위기설이 수그러들지 않는 근본 원인은 따로 있다. 삼성다움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삼성전자는 전직 임원이 연루된 기술 유출, 주력 사업에서의 기술 리더십 위협, 시장 지배력 하락 등을 겪고 있다. 기술 재편과 시장 다변화에 적기 대응하지 못한 탓이다. 회사에 정통한 재계 인사는 데일리임팩트에 “‘시스템’의 상징으로 불렸던 과거에는 있을 수 없던 일이 벌어지고 있다”며 “어떤 식으로든 고강도 쇄신은 필요하다”고 짚었다. 

이에 삼성전자가 안정에 무게를 실은 것은 대수술의 전주곡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일단 내년 조직에 긴장감을 불어넣기 위해 외부 영입에 적극 나설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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