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장유미 기자] 재계의 대표적인 경쟁 관계로 꼽히는 삼성전자와 현대차그룹의 관계가 최근 변화하고 있다. 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과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은 재계 순위는 물론 완성차와 반도체, 차량용 전장부품 등에서 치열한 경쟁을 펼쳐왔지만, 후대인 이재용·정의선 회장 체제가 본격화되면서 ‘미래차’를 위한 동맹이 강화되는 분위기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사진=뉴시스]

4일 재계에 따르면 양사는 창업주인 고 이병철·정주영 회장 시절부터 경쟁이 치열했다. 삼성은 1983년 이병철 회장의 ‘도쿄선언’을 통해 반도체 사업에 진출했고, 현대그룹 역시 같은 해 반도체 진출을 발표하며 현대전자(현 SK하이닉스)를 설립, 양사가 반도체 시장에서 경쟁을 펼쳤다.

특히 삼성이 1995년 삼성자동차(현 르노삼성자동차)를 설립하고 자동차 사업에 진출하며 갈등은 최고조에 달했다. 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반도체 빅딜 과정에서 현대전자는 반도체 사업에서 철수했고, 삼성 역시 고 이건희 회장의 오랜 ‘꿈’이었던 자동차 사업을 포기해야 했다.

이후 양사의 관계는 2000년대 이후 주력 사업이 전자와 자동차로 재편되면서 변화를 맞았다. 2001년에는 정주영 명예회장이 별세하자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이후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이 삼성그룹 영빈관인 승지원을 방문해 이 회장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면서 처음으로 단독 회동하기도 했다.

당시 이건희·정몽구 회장은 나라 경제를 위해 서로 협력할 분야가 있으면 협력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는데 인식을 같이 했다. 그러나, 이후로도 양 기업은 긴장 관계를 유지했고 실제로 사업적으로도 교류가 많지 않았다.

특히 정몽구 명예회장은 2014년 사옥 건설부지를 찾던 중 삼성동 옛 한전부지를 보고 삼성과 치열한 경쟁을 벌인 끝에 감정가의 3배가 넘는 10조5천500억원에 낙찰을 받았다. 또 차량 부품업체 하만으로부터 인포테인먼트 시스템과 카오디오를 공급받았던 현대차는 삼성전자가 2017년 하만을 인수하자 협력사를 LG전자, 보스(BOSE) 등으로 교체하기도 했다.

이건희 삼성그룹 선대회장이 별세한 지난 2020년 10월 25일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현대차 ‘펠리세이드’에서 내려 빈소로 향하고 있다. [사진=정소희 기자]

비로소 창업 3세대인 이재용·정의선 회장 체제가 되면서 양사는 그간의 경쟁을 잊고 본격적인 협력 관계로 발전했다. 이 회장은 지난 2020년 5월 정 회장이 삼성SDI 천안사업장을 방문한 지 두 달 뒤 현대·기아차 남양기술연구소를 답방, 전기차와 자율주행차, 도심항공모빌리티(UAM) 등 차세대 모빌리티 분야에서 다각도 협력 방안을 모색했다. 정 회장은 이 회장을 현대·기아차 연구개발(R&D) 전초기지인 남양연구소로 초청하며 재계 총수에게는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문을 열었다.

같은 해 10월 고 이건희 선대회장이 별세했을 때도 두 사람의 행보는 눈에 띄었다. 정 회장은 이건희 선대회장의 영결식에 참석하고, 이 회장은 빈소가 차려지기 전에 현대차의 스포츠유틸리티차(SUV)인 ‘팰리세이드’를 직접 몰고 두 자녀와 함께 장례식장에 도착해 주목 받았다.

2021년부터는 양사의 협력이 활발해지는 모습을 보였다. 현대차 첫 전용 전기차 ‘아이오닉5’에 삼성이 공급한 디지털 사이드미러용 유기발광다이오드(OLED)가 탑재됐다. 이를 시작으로, 지난해 6월에는 삼성전자가 프리미엄 인포테인먼트용 프로세서인 ‘엑시노스 오토 V920’을 현대차에 공급하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코로나19 여파로 차량용 반도체를 확보하기 어려웠던 현대차는 든든한 우군을 얻었다. 삼성전자 역시 성장성이 높은 인포테인먼트용 제품을 공급하면서 고객 다변화를 꾀할 수 있게 됐다.

지난해 10월에는 삼성SDI가 현대차와 협력에 나섰다. 2026년부터 2032년까지 7년간 차세대 유럽향 전기차에 들어갈 배터리를 공급하는 계약을 맺은 것이다. 삼성SDI와 현대차가 전기차 배터리 분야에서 공급 계약을 맺은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양사는 향후 차세대 배터리 플랫폼 선행 개발 등 협력관계를 지속해 나가기로 했다.

삼성전자 스마트싱스에 적용 예정인 홈투카 서비스의 예시. [사진=삼성전자]

여기에 삼성전자도 가세했다. 지난 3일 현대차와 카투홈(Car-to-Home)·홈투카(Home-to-Car) 서비스 제휴를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주거공간과 이동공간의 연결성을 강화하기로 한 것이다. 이에 따라 현대차·기아 고객은 차 안에서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의 화면 터치 또는 음성 명령으로 다양한 전자 기기들을 원격으로 제어할 수 있게 된다. 또 AI스피커, TV, 스마트폰 앱 등을 통한 원격 차량 제어도 가능해진다. 이를 통해 삼성전자의 사물인터넷(IoT) 플랫폼인 ‘스마트싱스’의 연동 범위도 더 확대된다.

이번 일을 두고 일각에선 삼성과 현대차의 관계가 이전보다 더 밀접해진 덕분이라고 평가했다. 현대차·기아 인포테인먼트개발센터장 권해영 상무는 “커넥티드 카의 카투홈·홈투카 서비스를 보다 다양하고 편리하게 활용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전 세계 현대차·기아 고객의 이동 여정이 유의미한 시간이 되도록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박찬우 삼성전자 부사장도 “이번 업무협약을 통해 미래 라이프스타일에 최적화된 홈투카 및 통합 홈에너지 관리 서비스가 가능해질 것”이라며 “스마트싱스 플랫폼과 자동차를 연결해 고객경험을 강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재계에선 양사의 협력이 앞으로 보다 더 강화될 것으로 전망했다. 재계 관계자는 “과거 이병철·정주영, 이건희·정몽구 회장 시절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이라며 “재계 순위 등 기업의 자존심과 명예를 중시하던 할아버지 세대와 달리 총수 3·4세들은 실용을 강조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이어 “과거엔 국내 시장만 놓고 경쟁했으나, 지금은 세계 시장에서 글로벌 기업과 경쟁해야 해 국내 기업끼리 경쟁보다는 동맹을 선택하는 것 같다”며 “이 회장, 정 회장 등 주요 그룹의 젊은 총수들은 선대보다 더 합리적이고 유연하게 소통하며 앞으로도 미래 먹거리를 위한 협력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그래픽=조은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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