밸류업이 '울프팩 한탕주의' 자극…'업종·기업별 특징 반영해야'
한 기업의 정기 주주총회가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재계가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에 관한 공동 건의서를 제출하는 것은 주주총회 시즌을 앞두고 ‘한탕주의’를 노리는 행동주의 펀드의 공격이 거세진 데다 정부가 지금까지 내놓은 정책의 구체성이 떨어져서다. 주요 기업들이 제출한 의견에는 이런 고민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밸류업이 '울프팩 한탕주의' 자극…'업종·기업별 특징 반영해야'

특히 지주사를 중심으로 다수 기업은 경영권 방어 수단이 필요하다고 건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밸류업 분위기를 타고 행동주의 펀드 등이 자사주 매입과 소각 등 강력한 주주 환원책을 내도록 압박하는 사례가 늘었기 때문이다. 영국계 자산운용사 시티오브런던 등 5개 행동주의 펀드는 울프팩(wolf pack·늑대 무리) 전략을 통해 삼성물산(028260)에 5000억 원 규모의 자사주 매입을 요청했고 금호석유(011780)화학·현대엘리베이(017800)터·삼양패키징(272550) 및 7개 금융지주도 행동주의 펀드로부터 주주 환원 확대를 요구받았다.

기업들은 무리한 자사주 소각 요구로 성장 경쟁력이 훼손되고 경영권마저 흔들릴 수 있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자사주는 의결권이 없지만 이를 우호 주주에 매각하면 의결권이 살아나 경영권 방어에 활용할 수 있다. 행동주의 펀드의 요구대로 자사주를 과도하게 소각하면 기업 경영권 방어력이 저해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재계에서는 상장사들이 경영권을 걱정하지 않고 자사주 소각에 나설 수 있도록 방어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을 꾸준히 제기해왔다.

선진국 대부분은 적대적 인수합병(M&A)이나 경영권 공격을 받을 때 대주주에게 시가보다 낮은 가격에 신주를 발행하는 포이즌 필, 특정 주주의 주식에 더 많은 의결권을 부여하는 차등의결권 등을 운영하고 있다. 한국은 이 같은 수단이 없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행동주의 펀드들이 정부의 주가 부양 의지를 인지한 뒤 본격적인 행동에 나섰다”며 “기업이 자사주 소각에 나서려면 선진국처럼 경영권 방어 수단을 허용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주요 상장사들은 기업가치 제고 여부에 따라 부여되는 인센티브와 페널티를 구체화해 정책의 불확실성을 줄여달라는 요구도 했다. 지난달 26일 발표된 기업 밸류업 지원 방안에 자사주 소각 시 법인세 혜택, 배당소득세율 및 상속세율 인하 등 시장에서 강력하게 요구했던 방안이 다 빠졌기 때문이다. 기업들은 당시 발표를 ‘자발적으로 주주 환원에 나서면 세제 지원을 고민해보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정부는 연내 세제 지원안을 추가 마련하기로 했지만 세부 방안과 일정을 특정하지는 않았다. 기업가치 제고 계획 공시와 관련한 가이드라인 확정이나 코리아 밸류업 지수, 상장지수펀드(ETF) 등 주요 일정은 대부분 총선 이후 또는 올해 하반기로 밀렸다. 한 상장사 투자자관리(IR) 담당자는 “구체적인 실행 방안, 눈에 띄는 인센티브, 공시 기준과 방법 등 필요한 내용이 발표되지 않아 기업 상황에 맞는 가치 제고 방안을 수립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토로했다.

개별 산업, 기업의 특징을 반영해 바람직한 주가순자산비율(PBR), 자기자본이익률(ROE) 기준을 제시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가령 바이오나 콘텐츠 산업은 기본적으로 기술 등 무형자산이 많아 PBR이 높을 수 있지만 부동산 형태로 생산시설을 보유한 전통적 제조사는 PBR이 낮게 나타나는데 이런 차이를 반영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업계 관계자는 “그룹 계열사마다 산업의 특성이 명확히 다르다”며 “PBR이 1을 웃돌아야 한다는 식의 획일적 기준을 적용하면 안 되는 이유”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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