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의 고립감 등 짚어…동양계 미국인의 삶 다뤄

'성난 사람들' 포스터
‘성난 사람들’ 포스터

[넷플릭스 제공·재판매 및 DB금지]

(서울=연합뉴스) 황재하 기자 = “망할, 왜 이런 짓을 하게 만들어?”(F***! Why’d you make me do that?)

땅거미가 진 시간, 도로 아래 비탈길에서 한 남성이 반자동 권총을 겨눈 여성을 힘껏 밀쳐 언덕 아래로 구르게 만든 뒤 이렇게 외친다.

남성의 표정에선 상대방을 멋지게 제압했다는 후련함이나 통쾌함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그의 표정은 ‘이런 짓까지는 하기 싫었는데’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15일(현지시간) 열리는 미국 프라임타임 에미상 시상식에서 총 11개 상의 후보에 오른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성난 사람들'(원제 BEEF) 속 한 장면이다.

남자의 이름은 대니 조(스티븐 연), 그에게 밀려 굴러떨어진 여자의 이름은 에이미 라우(앨리 웡)다. 철천지원수처럼 서로 총을 겨누고 언덕 아래로 밀어버리며 혈투를 벌이는 두 사람은 몇 달 전 우연히 처음 만난 사이다.

극 초반부 두 사람은 서로 차에 탄 채 마트 주차장에서 운전하다가 마주친다. 대니가 자기 차를 후진해 차를 빼려 하자 마침 뒤쪽을 지나가다가 부딪힐 뻔한 에이미는 경적을 길게 울리면서 신경질적으로 반응한다.

이처럼 사소하게 시작한 갈등은 점점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에이미는 경적을 울린 데서 그치지 않고 창밖에 손을 내밀어 도발한다. 대니가 경적을 울리며 차를 거칠게 몰아 뒤쫓자 에이미는 음료수를 대니의 차 앞유리에 던진다.

첫 만남에서 수모를 당한 대니는 에이미의 차 번호를 이용해 주소를 알아낸 뒤 집으로 찾아가 화장실 바닥에 소변을 흩뿌린다. 이에 에이미는 대니의 빨간 차에 흰 페인트로 모욕적인 말을 큼직하게 쓰는 것으로 응수한다. 이른 바 ‘로드 레이지'(RoadRage·운전 중 분노)가 불러온 보복전의 서막이다.

드라마 '성난 사람들' 속 한 장면
드라마 ‘성난 사람들’ 속 한 장면

[넷플릭스 화면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격렬하게 분노를 표출하는 두 주인공에게 시청자가 ‘왜 굳이 저렇게까지 할까?’ 의문을 품을 때쯤 드라마는 대니와 에이미 각자의 삶을 보여줌으로써 답을 제시한다.

한국계 이민자의 자녀인 대니는 부모님이 모텔을 운영하다가 사촌이 사고를 치는 바람에 모든 게 엉망이 됐다. 이 일로 부모님은 한국에 돌아가 일하고 있고, 미국에 집을 지어 부모를 모셔 오려는 대니의 계획은 요원해진다. 동생 폴은 종일 컴퓨터 게임만 한다.

중국계 이민자 가정에서 자란 에이미는 겉보기엔 자수성가한 사업가이지만, 경제적으로 무능한 남편을 비롯해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의지하는 상황에 숨이 막힌다. 지친 에이미는 빨리 사업체를 팔아넘기고 가족과 시간을 보내려 한다. 그런데 몇 년째 매각 협상은 지지부진하기만 하다.

이렇게 각자 화가 쌓이고 쌓인 두 사람이 우연히 서로 마주치고, 대니와 에이미는 울고 싶은데 뺨 맞은 격으로 서로를 향해 격정적으로 분노를 토해낸다.

드라마 '성난 사람들' 속 한 장면
드라마 ‘성난 사람들’ 속 한 장면

[넷플릭스 화면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원제 ‘BEEF’는 쇠고기라는 뜻 외에도 ‘불평’ 또는 ‘불평하다’ 또는 ‘싸우다’라는 뜻이 있다. 제목처럼 드라마는 내내 불평하고 서로 싸우는 대니와 에이미 두 사람의 모습을 보여준다.

자기 분에 못 이겨 화풀이할 대상을 찾는 사람이 대니 또는 에이미 한 사람뿐이었다면 이야기는 이상한 사람의 전기에 그쳤을지 모른다. 그러나 거울처럼 비슷한 두 인물의 행보를 다룸으로써 드라마는 인간 보편의 모습에 한 걸음 더 다가선다.

집 수리 일을 하는 대니는 고객의 갑질과 멸시에 시달리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혼자 분을 삭인다. 에이미는 온갖 스트레스에 시달리는데, 이런 심정을 털어놓으면 남편은 “긍정적인 사고를 하라”며 입을 막는다.

누구든 대니 또는 에이미처럼 삶의 무게에 짓눌려 터질듯한 감정을 느낄 수 있고, 감정을 제때 해소하지 않고 쌓아두다가 엉뚱한 곳에 분출하는 것은 도리어 자신을 멍들게 할 수 있다.

두 주인공이 격한 감정을 느끼면서도 타인의 공감을 받지 못하는 모습은 인간이 얼마나 고립된 존재인지를 상기시킨다. 각본과 연출을 모두 맡은 이성진 감독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코로나19가 발생한 이후 ‘로드 레이지’가 늘어났다는 기사를 본 일이 있다”며 “코로나바이러스가 악화시킨 것은 고립감”이라고 짚었다.

드라마 '성난 사람들' 속 한 장면
드라마 ‘성난 사람들’ 속 한 장면

주인공 대니가 한국에 있는 부모님과 화상 통화를 하면서 한국 전자제품을 보여주는 모습. [넷플릭스 화면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성난 사람들’에서 눈에 띄는 다른 특징은 동양계 미국인들의 삶을 소재에 활용했다는 점이다.

대니는 미국 정착에 어려움을 겪는 한국계, 에이미는 자수성가한 중국계 사업가다. 대니가 한인 교회에서 사람들을 만나 어울리면서 사업에 도움을 받는 과정이 자세히 그려졌고, 에이미의 남편과 시댁 사람들도 모두 일본계다.

‘성난 사람들’은 두 주인공이 동양계라서 이 모든 일이 벌어졌다고 암시하지는 않는다. 도리어 운전 중 시비로 화가 치밀어오르는 누구나 공감할 만한 소재로 몰입감을 끌어올린다.

에이미가 성공한 사업가로 그려지는 데서 볼 수 있듯이 동양계 미국인의 삶을 천편일률적으로 다뤘다고 보기도 어렵다.

다만 미국에서 동양계가 겪는 어려움은 드라마 곳곳에 반영됐다. 대니를 은근히 무시하는 고객이나 에이미의 회사를 사겠다면서도 애매한 태도를 취하며 갑질을 하는 조더나의 모습이 대표적이다.

‘성난 사람들’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흥미로운 서사, 선과 악 이분법적으로 해석할 수 없는 매력적인 인물들, 공감 가는 메시지까지 갖춰 호평받았다.

jae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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