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공화국 출범 이후 직선제로 선출된 최초의 대통령은 ‘노태우 전 대통령(이하 직함 생략)’이다. 그는 독재 정권의 후예로 12.12 군사 반란의 반란 수괴이자 5.18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민간인 학살에 연루된 용서받을 수 없는 이이기도 한 반면, 우리나라의 민주화로 가는 중간 단계의 가교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대통령이라는 상반되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또한 헌정 사상 첫 번째로 구속된 대통령이기도 하며, 전두환 전 대통령과는 달리 구속 이후 부과된 추징금 전액을 성실하게 납부하면서 나름의 책임을 진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오랜 투병 끝에 영면에 들었다. 지금부터는 여러모로 상반된 평가를 받는, 일각에서는 과소평가되고 또 일각에서는 과대평가되었다는 이야기를 듣는 그의 일생을 돌아보고자 한다.

 

 

학구적이며 신중한 인물로 기억되는

 

1932년 8월 17일 노태우는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 신용동에서 부친 노병수 씨와 모친 김태향 씨 사이에서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결혼 9년 만에 낳은 자식이었던 노태우는 대구 팔공산 근처에서 지내며 어려운 형편 속에서 공산소학교를 졸업하고 대구공업중학교를 지나 경북중에 편입, 순탄한 학창시절을 보내며 대구고보(현재의 경북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 그의 꿈은 의사였지만, 가정 형편으로 인해 이를 포기해야 했다. 1950년 한국전쟁에서 노태우는 학도병으로 징집됐으며, 이 과정에서 대구의 헌병학교에 입학해 이등병의 신분으로 참전했다. 1951년 10월에는 헌병학교의 정규 1기생으로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 군인으로서의 꿈을 키우게 된다.

육군사관학교 재학 중 그는 자신의 인생을 결정지은 평생의 친구를 만나게 된다. 바로 전두환 전 대통령이었다. 같은 대구 출신이자 육군사관학교 동기생이었던 전두환 전 대통령과 같은 방을 쓰며 노태우는 친분을 다지게 된다. 교내에서 노태우는 한 살 위였던 전두환 전 대통령을 옆에서 보좌해주는 역할을 주로 담당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1955년 2월 그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소위에 임관됐으며, 1956년 봄에는 육군 제5보병사단 소대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리고 이 시기에 박정희 전 대통령의 눈에 든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육사 11기생 동기들과 함께 친목모임인 북극성회, 하나회에 가입해 활동하던 노태우는 베트남 전쟁에도 참전하는 등 공을 세우며 육군 내에서 승진하며 자리를 잡게 된다.

 

 

12.12 사태를 거쳐 정치권 입문

 

1970년 육군대령으로 진급해 육군참모총장 수석 부관장교, 1971년 보병 연대장을 거쳐 1974년에는 육군 준장으로 진급한 그는 1976년 박종규, 차지철 등에 의해 발탁돼 청와대 대통령 경호실 행정차장보로 임명됐다. 1978년에는 육군 소장으로 진급했으며, 친구였던 전두환 전 대통령의 후원 아래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발탁된다. 이후 대통령 후계를 잘못 거론하다가 관련자들이 처벌을 받은 ‘윤필용 발화사건’으로 하나회 전체가 잠시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1979년 전두환 전 대통령의 보안사령부 사령관 복직에 맞춰 그도 육군 제9보병 사단장으로 전임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해에 노태우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운명을 가른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 사건이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의 피살 직후 노태우는 전두환 전 대통령과 함께 군부를 장악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동년 12월 12일,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자신의 친구였던 전두환과 함께 하나회 세력이 최규하 대통령의 승인 없이 계엄사령관 등을 체포했으며, 이듬해 5월 17일에는 정권 장악을 위해 비상계엄을 확대해 실권을 장악하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전두환은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주관 아래 실시된 장충체육관의 제11대 대통령 선거에서 99.4%의 득표율로 당선돼 대통령이 됐으며, 노태우는 전두환의 후임으로 국군보안사령부 사령관직을 역임하게 된다.

 

 

전두환 정권의 2인자가 되다

 

1981년이 되면서 노태우는 본격적으로 정치권에 입문하게 된다. 육군 대장으로 예편한 후 집권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에 입당해 당무위원이 되면서 당권을 장악하는 위치에 오르게 된다. 동년 7월 16일에는 정무 제2장관이 됐으며, 그해 말에는 대통령 특사로 임명돼 해외 순방길에 올랐다. 1982년 3월 20일에는 체육부 장관으로, 4월 28일에는 제41대 내무부장관을 역임했으며, 9월 25일에는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에 임명됐다. 동년 11월부터는 부총리라는 대외직명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전두환 전 대통령 또한 특별 배려를 목적으로 실제로 부총리급으로 대우하기 시작했다.

노태우는 전두환이 대통령이 된 이후부터 꾸준히 그의 후계자를 자처해 왔다. 초기 전두환 전 대통령은 노태우를 후계자로 낙점하지는 않았었던 것으로 이야기된다. 하지만 노신영, 장세동 등 국무총리직을 맡았던 인물들이 전두환 전 대통령의 후임으로 이야기될 때도 불평불만을 끝까지 드러내지 않고 참아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태우는 서울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을 준비하면서 1985년 2월 제12대 총선에 전국구로 출마해 당선됐고, 곧바로 민주정의당 대표위원으로 임명되면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노신영 전 국무총리에 대한 전두환 전 대통령 주변 인사들의 반발이 심해지면서, 결국 전두환 전 대통령도 종국적으로는 노태우를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게 된다.

 

 

3김 분열, 최저 득표율로 당선된 보통 사람

 

6월 민주항쟁의 계절이 다가왔다. 제5공화국 헌법에 따라 전두환 전 대통령은 간접선거로 노태우를 대통령으로 앉히고자 했고, 시민들은 전국적인 시위로 반발에 나섰다. 결국 노태우는 대통령 선거 직선제 개헌, 김대중 전 대통령 사면복권 및 구속자 석방, 사면, 감형 등의 민주화에 대한 요구를 대폭 수용하는 6.29 선언을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987년 7월 6.29 선언을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받아들이면서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 이후 16년 만에 대통령 선거가, 그것도 직선제로 치러지게 된다. 제13대 대선의 주요 후보는 여당인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그리고 3김으로 일컬어지는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 평화민주당 김대중 후보,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후보의 4명이었다.

대선 시즌 초창기에는 노태우의 패배가 예상됐다. 스스로가 ‘보통 사람’임을 내세우는 노태우의 선거 전략은 화제가 됐지만, 당선자는 노태우가 아닌 3김 중 한 명이 될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야권의 분열이 일어나면서 집중도가 흐트러졌고, 김영삼 당시 후보가 28%, 김대중 당시 후보가 27%의 득표율을 기록하면서 표가 분산되는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 결국 제13대 대선은 역대 대통령 중 최저 득표율인 36.6%를 득표한 노태우가 당선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3당 합당을 주도하다

 

비관론을 딛고 화려하게 취임했지만, 노태우에게 있어 자신의 친구였던 전두환 전 대통령의 그늘은 무거웠다. 화합을 내세우던 제6공화국 정부는 제5공화국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전두환과 선을 긋기 시작했다. 제5공화국의 핵심 인사들을 정리하고, 전두환 전 대통령의 친인척을 비리 혐의로 구속시켰다. 국정감사의 부활은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직에 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의 백담사 은둔으로 이어졌고, 제6공화국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재임 시절과는 다른 정책을 펼치며 국정을 수행해 나갔다.

하지만 과거보다 진보적인 정책들을 내세운 제6공화국의 움직임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여소야대의 4당 체제가 노태우의 발목을 잡았다. 정책 수행에 속도를 내지 못하던 1989년, 노태우는 보수 대연합을 명분으로 하는 정계개편론에 무게를 싣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여당인 민주정의당과 야당인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을 합당해 민주자유당을 창당하는 3당 합당을 진행하게 된다. 노태우가 주도한 3당 합당은 이전까지 팽배했던 지역주의를 더욱 공고히 만드는 부작용을 가져오는 한편, 제6공화국의 정책에 힘을 실어주는 기폭제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후 제6공화국은 현재의 시점에서 평가할 때는 파격적이라고 봐도 좋을 진보적인 정책을 속도를 올려 추진했다.

 

 

민주화의 시작, ‘물태우’라는 별명

 

문화적으로는 정치인에 대한 풍자의 자유를 허용하고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한편, 사회적으로는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해 강력, 조직범죄의 차단을 꾀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고, 1991년에는 한반도 비핵화를 공식 선언하면서 UN에 북한과 동시 가입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당시 유행하던 ‘물태우’라는 단어는 노태우를 비꼬는 표현임과 동시에, 그가 얼마나 사회적으로 대한민국을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국가로 이끌어 갔는지를 나타내는 단어이기도 하다.

하지만 3당 합당을 성사시킨 이후로도 노태우는 당권 다툼에 시달려야 했으며, 제5공화국의 그늘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전 대통령에게는 없었던 ‘레임덕’이 찾아왔고, 초창기의 공격적인 정책 추진의 모습은 총선 이후가 지나면서 그 빛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당내에서는 후계자 자리를 두고 고 김영삼 전 대통령과 ‘6공의 황태자’ 박철언 전 의원의 갈등이 끊이질 않았다. 1992년 잡음이 그치지 않던 상황 속에서 치러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은 과반에 못 미치는 149석의 의석을 확보하는데 그쳤으며, 노태우는 민주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마침내는 탈당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1992년 10월 9일, 전례 없던 중립내각이 출범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행보가, 이제는 매 정권 때마다 대선 직전 대통령이 탈당하는 선례로 남게 된다.

 

 

독재 정권의 적자, 또한 경청하는 대통령

 

고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권력이 이양된 이후 노태우는 연희동 자택으로 퇴임했다. 하지만 세상은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대통령 퇴임 이후 금융실명제가 전격적으로 시행이 되면서 노태우의 비자금 보유설이 돌기 시작했다. 1995년 8월 서석재 총무처 장관의 입에서 “전직 대통령 중 한 사람이 4천억 원의 차명계좌를 보유하고 있다”라는 소식이 전해졌고, 그 주인공으로 노태우가 지목을 받은 것이다. 또한 1995년 10월에는 신라호텔에서 열린 경북고등학교 동창회 모임에서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한 망언을 하면서 도마에 오르기도 했다. 대중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논란이 커져가던 와중인 1995년 10월 27일, 노태우는 연희동 사저에서 비자금을 수수하고 사용한 사실이 있음을 시인하는 기자회견을 가지게 된다. 결국 노태우는 동년 11월 1일 대한민국 전직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검찰 조사를 받게 되었으며, 6일 후에는 구속 수감되게 된다. 결과적으로 노태우는 내란죄와 포괄적 뇌물죄가 인정돼 유죄를 선고받았으며, 1997년 4월 17일 징역 17년 및 추징금 2,628억 원이 부과됐다.

노태우와 그의 친구였던 전두환 전 대통령의 구속은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가져다줬다. 이후 노태우는 제15대 대선 이틀 후에 고 김영삼 전 대통령에 의해 사면복권됐으며, 전두환 전 대통령과는 달리 이후 성실하게 추징금을 납부해 현재 완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면 이후 노태우가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거의 없었으며, 2002년 전립선암을 치료한 이후로는 급격히 건강을 해친 것으로 전해진다. 2007년 6월에 열린 6.29 선언 2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이후로는 소뇌위축증이 심해지고 암이 재발해 병상에서 지내고 있는 상태다. 그리고 오랜 기간 투병을 이어온 끝에, 마침내 올해 영면에 들었다. 노태우는 비록 독재 정권의 적자였으며 현재까지 국내 정치사에 얼룩을 남기고 있는 3당 합당을 주도한 인물이지만, 또한 민주화의 시대를 열면서 성실하게 맡은 소임을 다한 대통령이라는 복합적 평가를 받는 정치인으로 기억될 것이다.

글 : 최덕수 press@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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