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12월 20일 전라남도 영광군 법성면 용덕리에서 태어난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이하 직함 생략)는 가난한 농부의 집안에서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처음부터 그가 장남은 아니었는데, 위로 두 형과 누나가 있었지만 어린 시절 세상을 떠났기에 장남이 된 것이었다. 가난한 집안 사정에도 불구하고 모친의 뒷바라지 덕에 그는 무사히 대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서울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한 그는 같은 과의 다른 학우들과는 달리, 생계를 위해 바로 생활 전선에 뛰어들게 된다. 그가 선택한 직업은 법조인이 아닌 ‘기자’였다.

 

 

기자로 시작한 사회생활

 

1979년 동아일보에 입사한 이낙연은 이후 21년 동안 재직하며 정치부 차장, 국제부장, 논설위원을 역임했다. 그가 주로 담당했던 정치인들은 동교동계 인물들이었는데, 이러한 취재 과정에서 자연스레 고 김대중 대통령과 연을 맺게 된다. 1987년 사면 복권된 김대중 대통령을 취재하면서 친분을 쌓게 됐으며, 이를 계기로 1989년부터 정치권의 러브콜을 계속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출마를 계속 거절하던 그는 마침내 2000년 16대 총선에서 새천년민주당의 후보로 총선 출마를 결심했다.

전라남도 자신의 고향을 선거구로 삼아 출마한 그는 무난하게 당선됐다. 총 60.2%의 득표율로 초선의원 배지를 단 그는 이후 19대까지 줄곧 동일 선거구에 출마해 4선까지 높은 득표율로 승리를 거머쥐었다. 새천년민주당에서 2008년 18대 총선에는 민주당으로, 19대 총선에는 민주통합당으로 줄곧 이낙연은 민주당계 정당에 적을 두고 활동했다. 국회의원 활동 시 그는 주로 대변인으로 활발하게 활동했는데, 초선 당선 이듬해 새천년민주당 대변인을 시작으로 2002년 16대 대선에서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선 대책위원회 대변인을 맡기도 했다.

 

 

4번의 총선 승리, 그리고 도지사

 

새천년민주당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 발의로 인해 위기를 맞은 바 있다. 범친노계 정치인들이 열린우리당을 창당하며 분당을 맞게 되면서, 새천년민주당은 여당임에도 불구하고 17대 총선에서 9석 의석 확보라는 충격적인 결과를 받게 된다. 이낙연은 당시 9명의 새천년민주당 당선 의원 중 한 명이었다. 총선 직후 이낙연은 새천년민주당의 원내대표로 선출됐으며, 이후 민주당, 중도통합민주당, 대통합민주신당을 거쳐 통합민주당 소속으로 활동을 이어갔다.

또한 국회 농림수산식품위원장, 민주당 전남도당 위원장, 사무총장을 역임했으며, 대변인만 5번을 맡으며 꾸준히 의정 활동을 이어갔다. 이후 2014년에 이르러 그에게 한 번의 전기가 찾아오게 되는데, 바로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였다. 이낙연은 지방선거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의 후보로 전라남도지사 선거에 출마를 결심하게 되는데, 선거 결과는 78%라는 압도적인 득표율의 승리였다. 통합진보당 이성수 후보, 새누리당 이중효 후보를 압도한 이낙연은 제37대 민선 6기 전라남도지사가 되게 된다.

 

 

문재인 정부의 초대 국무총리가 되다

 

전라남도지사 활동 당시에도 이낙연은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지금은 유명한 ‘100원 택시’ 제도는 그의 손을 거쳐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전라남도 주민들이 택시를 부르면 가장 가까운 버스정류장까지 100원을 받고 운행한 후, 요금 차액은 자치단체에서 부담하는 제도다. 현재 이 제도는 낙후된 농촌 지역 복지제도의 성공 사례로 꼽히고 있으며, 많은 지방자치단체에서 이를 벤치마킹한 제도를 내놓고 있다. 이외에도 일자리 창출 면에서도 성과를 인정받아, 고용노동부로부터 일자리종합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도지사로 차츰 명성을 쌓아가던 이낙연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온 것은 2017년이었다. 제19대 대선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자, 이낙연을 새 정부의 국무총리로 내정한 것이다. 이낙연이 총리로 내정된 것은 당내에서 계파색이 옅고 특별한 물의를 일으킨 적이 없으며, 호남 지역을 아우를 수 있는 인물로 그가 적격이었기 때문으로 평가된다. 2017년 5월 10일 국무총리 후보로 지명된 이낙연은 동년 동월 25일부터 진행된 국회 청문회를 거쳐 5월 31일에 임명 동의안이 가결되며 제45대 국무총리로 임명됐다.

 

 

책임 총리로 존재감을 드러낸

 

문재인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지명하며 공언한 것은 ‘책임 총리’였다.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의전직으로 치부됐던 총리가 아니라, 각종 현안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는 실세형 총리가 될 것이라 공언한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낙연은 그에 부합하는 활동을 했다. 조류 인플루엔자 확산, 가뭄, 수해, 살충제 계란 파동 등이 벌어질 때마다 이낙연은 총리로서 현장을 찾고 또 지휘했다. 그 덕에 그는 어느 정권의 총리보다도 자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인물이 됐다.

기자 활동을 통해 다져진 언변도 대중들의 많은 주목을 받았다.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야당 의원의 질문에 능수능란하게 답변하는 모습이 자주 전파를 탔고, 각종 매스미디어에 출연해 적극적으로 정부의 국정 운영 방향과 현안을 직접 설명하는 모습을 보였다. 활발한 활동은 곧 대중들의 지지로 나타났다. 어느덧 이낙연은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로 부상했으며, 현재 시점에서도 굳건한 지지율 1위 주자로 자리를 잡고 있다.

 

 

다시 총선 출마, 5선 국회의원이 되다

 

이낙연의 총리직 수행은 2020년 1월 13일까지 이어졌다. 총 958일의 재임기간을 기록하면서 노태우 정부 이후 최장기간 재임 국무총리로 퇴임한 그는 곧 제21대 총선 출마 의지를 밝혔다. 출마 지역은 서울 종로구였다. 선관위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선거구인 종로구는 소위 ‘정치 1번지’로, 대권주자들의 시험 무대와도 같은 역할을 하는 곳으로 여겨진다. 제21대 총선에서 그의 상대는 보수 진영의 유력한 대권주자로 꼽히던 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였다.

많은 이들의 관심을 모았던 선거는 이낙연의 압승으로 끝났다. 여론조사 기간에도 한 번도 우세를 놓지 않았던 이낙연은 58.83%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승리했고, 5선 국회의원으로 다시 국회에 입성했다. 총선에서 이낙연이 속한 더불어민주당은 176석의 의석을 보유한 거대 여당이 됐으며, 자연스레 차기 당 대표가 누가 될 것인지가 관심사로 떠올랐다. 대부분 이낙연이 차기 당 대표가 될 것으로 점쳤으며, 실제로도 이낙연은 7월 7일 당 대표 출마를 공식 선언하게 된다.

 

 

당 대표가 된 이낙연의 다음 행보는

 

김부겸 전 장관, 박주민 의원과 함께 뛴 당 대표 선거에서 이낙연은 압승을 거뒀다. 이낙연은 60.77%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김부겸 전 장관(21.37%), 박주민 의원(17.85%)을 누르고 더불어민주당의 새로운 당 대표로 선출됐다. 이낙연은 신임 당 대표 당선 소감으로 “코로나19 전쟁에서 승리해 국민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겠다”며, “여의도 국회만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통합을 이루는 정치 토대가 되는 민주당을 이끌겠다”며 당선 소감을 전했다. 아울러 그는 차기 대선에 대해 “문재인 정부의 성공과 총선 승리, 정권 재창출에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덧붙였다.

이낙연이 가장 좋은 평가를 받는 능력은 ‘상황 수습’에 관련된 것이다. 재난 상황에서 민심을 아우르는 행보를 꾸준히 보였으며, 위기 상황에서 탁월하게 대처한 점이 높게 평가돼 왔다. 현재 더불어민주당과 정부는 2차 재난지원금 선별지급, 개천절 집회, 부동산 정책 후폭풍 등 다양한 안건에 마주해있다. 이 상황을 이낙연의 리더십으로 잘 넘길 수 있을지가 당분간의 관건이 될 전망이다. ‘어차피 다음 대통령은 이낙연’이라는 말까지 돌고 있는 작금, 이낙연이 과연 차기 대선까지 지금의 지지율을 계속 유지해갈 수 있을지 관심이 집중된다. 

글 : 최덕수 press@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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