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의언론=김광휘 방송작가]

작년 1010일에 작고한 김남조 시인의 추모집 ‘겨울바다로 가신 시인 김남조’  발간 기념행사가 31일 오후 4시 경기도 과천시 K&L MUSEUM에서 열린다.

추모집을 낸 김광휘 방송작가 주관으로 유자효 시인, 고은정 성우, 김은전 서울대명예교수 김봉근 카톨릭대 명예교수 등이 참석한다. 유족 대표로 장남 김녕 서강대 교수가 답사를 한다. 초청된 가수들은 김남조 시인의 대표작 그대 있음에등을 부른다.

아래는 추모집에 나오는 내용 중 김광휘 방송작가가 쓴 부분이다. (편집자 주)

어느 화창한 가을날 MBC가 여의도에 있을 때, 오후 프로그램을 써주기 위해서 방송사로 들어설 때였다. 차를 대고 정문 쪽으로 나오자 화사한 정원석 위에 한복을 입으신 김남조 선생이 앉아계셨다. 나는 깜짝 놀라 선생님을 반겼다.

선생님, 웬일이세요? 우리 방송사에 웬일이세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하시나요?”

선생님은 빙긋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바로 이 MBC의 이사예요. 호호. 얼마 전, 이희호 여사가 나보고 MBC 이사를 해보라고 하시데난 사양했지 뭐. 이미 KBS 이사를 해봤으니까그런데 이희호 여사가 자꾸 강권하시는 거야. ‘, 힘든 것도 아니잖아요. 해보세요. 괜찮을 거예요. 호호.’  이래서 내가 이 대MBC의 이사라구.”

그때 가수 송창식 씨가 들어섰다. 손에 기타를 들고 그도 역시 그 특유의 한복 차림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선생님을 보자 아주 큰 소리로 친근하게 외쳤다.

아이고, 대시인님께서 웬일이세요? 이 방송국까지 왕림하시고! 아하 참, 오늘 제가 나오는 프로에 선생님이 대게스트이시죠? 오늘 시인님이 메인 게스트예요. 저는 곁에서 기타 치며 노래하는 역이구요. 아잇, 잘 만났어요! 우리 여기서 리허설 한 번 해요.”

선생님은 가방에서 시집을 꺼내시고 그날 방송에서 소개할 이라는 시를 읊기 시작했다. 송창식은 기다렸다는 듯 그 특유의 미소를 띠우며 기타로 선생님 시의 반주를 시작했다.

막내는 열 살

예뻐서 못 견디는 엄마가 업어준다

초밤별 금빛 불티

순금빛 숯불

인두질하는 인두질하는

불의 살결을 어이야 하리

한공 구만리

더운 몸의 외로움을

별들은 안다

명멸하는 숨결의 애련

생명은 아픔이며 무상인 탓에

사랑에 값함을 별들은 안다

서럽게 진실한 만남

목화 실뿌리가 내리는 연분

그 날의 기도 구절도

별들은 알고 있다.

막내는 열 살

이승의 밤하늘에

날이 날마다 별이 솟는 놀라움을

어린 아들과 나눈다

송창식이 반주를 끝내며 씩 웃자, 선생은 말씀하셨다.

난 가수 중에서 송창식 씨가 제일 좋아요. 우선 목이 탁 트였잖아요. 막힘없이 흐르는 청산유수예요. 그래, 가수의 노래는 흐르는 물처럼 유연해야 돼요. 클클하거나 막힘이 있어서는 안 돼요.”

선생께서는 송창식 가수에게 청했다.

, 뭐더라… ‘우리는우리는’ 이런 노랫말로 시작되는 노래 있잖아요?”

그러자 송창식은 기타 줄을 퉁기면서 주저 없이 노래로 들어갔다.

<우리는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도 찾을 수 있는

우리는 아주 작은 몸짓 하나라도 느낄 수 있는

우리는 우리는 소리 없는 침묵으로도 말할 수 있는

우리는 마주치는 눈빛 하나로 모두 알 수 있는

우리는 우리는 연인

기나긴 하 세월을 기다리어 우리는 만났다

천둥치는 운명처럼 우리는 만났다

오 바로 이순간 우리는 하나다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우리는 연인

우리는 바람 부는 벌판에서도 외롭지 않은

우리는 마주잡은 손끝하나로 너무 충분한

우리는 우리는 기나긴 겨울밤에도 춥지 않은

우리는 타오르는 가슴 하나로 너무 충분한

우리는 우리는 연인

수없이 많은 날들을 우리는 함께 지냈다

생명처럼 소중한 빛을 함께 지녔다>

송창식이 자신의 노래에 취해 유연하게 노래를 풀고 나자 선생께서 물으셨다.

송창식 씨, 도대체 이 노랫말을 누가 지은 거예요?”

송창식이 쑥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지었어요. 제가 노랫말을 쓰고, 곡도 붙였죠.”

그러자 선생께서는 진정으로 탄복하는 투로 말씀하셨다.

정말이에요? 그렇다면 당신은 천재예요! 이건 시 중에서도 일류의 시예요. 이거야 원, 우리 시인들이 밥 벌어 먹을 수 있겠나요? 송창식 씨 같은 천재들이 우리 시를 멋대로 차용해다 쓰면 우리 시인들은 뭘로 밥을 먹고 살 수 있단 말이에요? 그리고 곡도 너무나 아름다워요. 슈베르트 곡보다 더 현란한 것 같아요.”

송창식은 머리를 긁으며 얼굴을 붉혔다.

가사가 좀 치졸하지 않은가요?”

천만에, 천만에시인 백 사람이 달라붙어도 이렇게 멋진 시는 못 써낼 걸요? …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도 찾을 수 있는소리 없는 침묵으로도 말할 수 있는, 이런 구절은 웬만한 시인도 그릴 수 없는 기가 막힌 표현이에요오늘 부로 송창식 씨는 시인으로 승격함!”

송창식은 머리를 긁으며 기뻐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고백했다.

사실 저는 여러 번 선생님의 시를 가지고 가요를 만들어보려고 시도해 봤어요. 그런데…”

그런데? ? 내 시가 노래에 잘 맞지 않나요?”

송창식은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시인님, 솔직히 말씀드릴까요?”

말해 봐요.”

사실 선생님의 시는 가요로 바꾸기에는 너무 어려워요. 왜냐면 선생님의 시는 성당에서 울려오는 기도문 같거든요. 무슨 성서 구절 같기도 하구요.”

선생은 가수 송창식과 코드가 맞는 듯했다. 선생은 송창식의 또 다른 노래를 칭찬해주셨다.

, 서정주 선생의 시 있잖아요. 그거 좋던데요. 오늘 들려줘요.”

송창식은 신이 났다. 그는 다시 기타 줄을 울렸다. 어느새 정원 곁에는 방송사에 왔던 탤런트, 가수들이 즐비하게 서있었다. 송창식은 개의치 않고 푸르른 날을 신나게 불러재꼈다.

사실 내가 프로듀서라면 직접 대본을 써서라도 선생의 뮤지컬 한 편이라도 쓰고 직접 연출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방송사에서 써달라는 내용만 콕 찍어서 써줘야 하는 방송작가였다. 프로그램을 내 마음대로 만들 수 없는 방송작가의 지나지 않는다.

나는 어린이날 어린이들을 위한 뮤지컬 서너 편을 세종문화회관에서 히트시킨 일은 있다. 그러나 우리 선생님의 시를 가지고 송창식의 유연한 작곡과 음악성에 기대어 멋진 뮤지컬 한 편을 뽑아내지 못했다. 그 뮤지컬의 시낭송을 선생님께서 직접 해주셨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김남조 시인이 낭송하고 송창식이 기타로 반주하는 그 어떤 명곡이 나올 법도 했을 터이다.

편집자 주: 송창식은 그 뒤 김남조 시인의 ‘그대 있음에’를 작곡해 불렀다. 

 
#김남조시인, #겨울바다로 가신 시인 김남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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