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의언론=배재희 강호논객]

나는 ‘소화불량’이었다. 아내와 처음 알고 지닌 15년 전부터. 그녀 전화기에 지금껏 그리 표기되어 있었다. 더 정확히는 ‘소화불량’ 네 글자 뒤에 분홍색 하트 표시가 술어처럼 덧달려 있었으니 우린 연애를 시작하기 한참 전부터 심상치 않은 사이였던 게 분명하다.

내가 ‘소화불량’인 것은 그녀가 보기에 너무나 웃겼기 때문이라고 했다. 좀 더 디테일하게 서술하자면, 이 사내의 요절복통한 퍼포먼스 때문에 그녀는 밥을 먹을 때 혹은 통화하면서 웃느라고 숨이 넘어가고 급체를 했다. 이러다 웃다가 졸도해 죽은 최초의 인간이 될지 모른다며, 그러니 제발 예고없이 웃기지 말아달라고 손 모아 부탁을 할 정도였다. 흥. 그럼 순순히 나와 사귀어주던지.

나는 그녀께 항시 감사드린다. 전화기에다 그냥 시큰둥하게 ‘웃기는 놈’, ‘괴짜’라고 입력해놓을 수도 있었을텐데 ‘소화불량’, 이런 식의 애두른 귀여운 평가를 해주었으니. 한국어에는 이런 남녀 간 상황을 독특한 영어적 가공을 거쳐서 ‘썸을 탄다’(riding something)라고 표현한다. 참으로 멋진 콩글리쉬다. ‘썸’이라니. 이 얼마나 함축적인가. 의문과 여백이 가득한 로맨틱한 단어 아닌가. ‘Dating but not exclusive’ 이런 정식의 영어 표현들보다 훨씬 우아하고 보슬보슬하다.

어쨌든 아내의 호의와 호감 덕분에 우리의 연애는 어찌어찌 이뤄졌고 나는 그녀와 결혼해 여전히 기가 차게 웃기는 인간으로 역할하며 살고 있다. 집에서 그녀 손으로 빚은 밥과 국도 얻어먹는다. 이런걸 사랑의 비결이라고 당당히 떠들만한가 묻는다면, 뭐 그럭저럭 괜찮지 않냐고,너스레 떨며 대답하겠다. 뭐 그녀인들 이제와서 뭘 어쩌겠어.

백일 갓 지난 아기, 우리 딸아이도 아내와 비슷한 심정임을 나는 근래 알아챘다. 아기는 대략 나를 ‘웃기는 아저씨’, 수시로 희극적 연출을 하는 사내로 여기는 눈치였다. 내가 익살스런 표정을 얼굴에 그려보이면 순식간에 아이 얼굴에는 즐거움이 로켓처럼 폭발을 했다. 바닷가 몽돌인양, 얕은 개울의 조약돌인양 컬러풀한 소리를 냈다. 깔깔깔깔. 나는 이 깔깔거림을 하루라도 듣지못하면 견디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제발 그만 좀 웃겨달라고 질책하던 처녀적 아내와 달리 아기는 내게 매번 더 강렬한 익살을 요구했다. 나는 더욱 신이 나서 파르르 떨게 된다. 날개를 떠는 고추잠자리처럼, 꼬리를 마구 흔드는 강아지처럼. 나는 신이 난다. 나는 기쁘다. 나는 봄날이요 봄볕이다. 너에게 있어서 나는. 그리고 아이야. 내게도 넌 그런 존재란다.

아이가 이처럼 퇴근 후의 내 감정과 기분을 휘저어놓고 있으면 나는 새삼 충격적인 현실을 깨닫게 된다. 총각 시절 이래 오래도록 나를 지켜왔던 단호함들, 독립된 개체로서의 단단함이 순식간에 휘발되고 사라져버리고 없음을.

외부와 타인에게 영향받지 않는 안정감으로서 내 인생을 감싼 포장들은 죄다 벗겨지고 없다. 대신 아기의 희노애락에 완연히 포박당해서 함께 웃고 함께 우는 서툰 ‘아빠’만이 남아 있다. 평생에 걸쳐 겪어본 가장 격렬한 존재론적 급전직하이다. 이제 아기 없는 나는 ‘부존재의 존재’다. 사실상 ‘없다’는 말이다. 다만, 이 경험을 기꺼이 ‘행복’으로 수용하고 살고 있을 뿐.

요는, 사람이 이렇게까지 정서적으로 불안정해져도 괜찮은 걸까. 아기가 텀벙 컬러풀한 웃음의 파문을 일구면, 나는 가슴이 우당탕탕 진동하고 이내 그 안을 첨벙첨벙 헤엄친다. 눈물이라도 날 것 같은 불안정한 감정의 곡선을 타게 된다. 사랑이란 대체 왜 이리 놀랍고도 두려운가. 이 얼마나 한 인간을 의존적이고 취약하게 헤집어놓는 정서적 포말이란 말인가.

내 삶을 비비고 들어온 이 아기 덕분에 이제 이전의 안정감 넘치고 호젓하며 고요했던 인생은 표백되고 영영 사라져버리고 없다. 정신없이 만물이 널부러진 퇴근 후의 우리 집 거실이 함축하듯. 대신 나는 어두컴컴한 방안에서 누운 아기, 그 작은 얼굴과 영롱한 소우주 같은 눈을 내려다 보며, 어떤 필연적 존재로 옮겨진다.

주님은 왜 내게 이 소우주를 선사하시는가. 한없이 시시한 사내의 인생에 어떤 존재론적 사명이 아직 남아있길래. 아기 젖냄새, 그 미지근함과 은은함,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비폭력적이고 유락한 감정으로 이끄는 이 존재는 나에게 무슨 용무가 있어 찾아온 걸까. 나에게, 아내에게, 우리 가정에게, 그리고 하나님 당신께 대체 이 아이는 어떤 용무입니까.

다만 한가지, 이 아이를 통해 하나님이 건네주신 선물의 목적 하나를 나는 심플하게 확실히 깨달아 안다. 그 선물은 효과가 즉각적이고 실제적이다. 아이가 나를 노처럼 휘저고 나면, 그 컬러풀한 물살 위에서 파도를 타다보면, 나는 출근과 퇴근을 반복하는 인생살이의 고단을, 그 악착같음과 열의, 우환들로부터 내 인생이 잠정적으로 보류되는 느낌을 얻게 된다. 세상의 복잡성으로부터 뚝 떨어진 외딴 섬에 옮겨진 느낌이 든다. 이 희열은 내 부모님도, 내 아내조차 주지 못한 강렬하고 즉자적인 해소의 경험이다. 아무래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내 위태로웠던 인생에 아기는 참으로 필요했었던가 보다. 정작 나 자신은 몰랐더래도. He knows me.

나는 아이와 멀찍한 곳으로 옮겨진다. 바깥 세상으로부터, 여러 종류 군상들 사이에 매번 느꼈던 지리멸렬과 넌더리, 쓸모없는 물상들로부터 결코 침해당하지 않는 외딴 곳, 그곳에서 몹시도 안전한 인간이 되어 있다. 이 순간 나는 ‘다 가진’ 인간이 되어 있다. 충족이라기 보단, 차라리 해탈의 경험이다.

발그레한 아기 표정이 좋다. 어떤 장식적 제스처도 없는 심플하고 참 아기다운 웃음, 웃음다운 웃음이다. 혹시 이 글 읽는 여러분의 아기도 여러분에게 그랬었던가요. 그 작고 동그란 입이 뱉어내는 웃음과 하품과 새근거림이 당신께도 거대한 위로였던가요? 그렇다면 대체 당신은 얼마나 좋았던 겁니까. 정말 행복한 계절을 났던 거로군요.

그러하다. 집 밖에선 아빠가 ‘비록 그랬을 지라도’, ‘그랬거나 말거나’, 혹은 ‘그렇든 어떻든’, 아기는 내가 무척 괜찮은 존재라고 말해주는 듯 하다. 어이! 아빠. 당신은 더 나은 아빠가 될 수 있어요, 어이! 그러니 힘을 내어보라구요. 이렇게 어깨를 토닥거려주는 아기의 동정심을, 그 너그러운 격려를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이 정도의 보석같은 모멘트를 잊을 방법이란 애초에 없는 것이다.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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