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20년이 넘도록 한 번도 다른 곳에서 살아 본 적이 없다”는, 말 그대로 ‘구로동 헤리티지(Heritage)’가 있다.

1999년생인 저자 박민서는 책 <구로동 헤리티지>(한겨레출판 펴냄)에서 “내게 ‘우리 동네’는 언제나 구로동이었고, 가장 잘 아는 동네 또한 구로동이다”라고 말한다. 특히 구로동에 거주하는 많은 중국인들 덕에 자연스럽게 접한 마라탕을 이야기하며 자신을 ‘마라 얼리어답터’라고 소개하는 대목에서는 ‘나의 구로동’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하다.

“정확히 언제부터 먹기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라탕 열풍이 일어나기 훨씬 전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그리고 이런 마라 얼리어답터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내가 구로동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책 <구로동 헤리티지> 171쪽)

그럼, 지금부터 저자 박민서가 말하는 ‘나의 구로동’으로 가보자.

‘나의 구로동’에서 일어난 ‘그 사건’

저자는 초등학생 당시 구로구 슬로건을 ‘Digital GURO(디지털 구로)’로 내건 구청장이 ‘강남 아이들 앞에 가서도 절대 기죽지 말라’고 했던 연설을 언급하며 “살면서 한 번도 강남에 열등감을 느낀 적이 었었는데 그걸 느꼈어야 했던 건가”라고 푸념을 늘어놓다가도 구로동에서 매년 열리는 ‘성 패트릭의 날'(아일랜드 국경일인 3월 17일을 기념하는 날) 축제에 대해서는 “전국에서 모인 아일랜드인들의 연대 속에서, 그곳을 일상적으로 오가던 나는 오히려 소수의 위치에 놓인다. 그렇게 다수의 위치에 속했던 사람들은 낯섦을 경험하며 소수자가 일상적으로 느끼는 감각을 잠시나마 체감하게 된다”고 했다.

▲ 옛 서울남부구치소(영등포구치소) 모습과 구치소 철거 후 모습. ⓒ구글

저자는 또 서울남부구치소가 있던 자리에 45층짜리 초고층 아파트가 건설되면서 일대가 재탄생했지만, “이곳이 마냥 즐거운 공간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며 1987년 12월 16일 13대 대통령 선거 당일 벌어진 ‘구로구청 점거농성 사건’을 떠올렸다.

“쇼핑몰로 들어가는 초입에 누워 있는 상당한 크기의 기념비 때문이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한때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었던 기억을 품어 본다’는 구호 함께 그곳에 수감되어 있었던 고 백기완 소장과 고 김지하 시인, 고 김근태 전 장관과 이부영 전 의원 등의 행적을 기록한 비석이다. 한때 ‘자유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빨갱이’라는 이유로 탄압받았던 이들의 생애와 그들의 투쟁 덕분에 도래한 민주화의 시대, 그리고 그것을 발판으로 세워진 오늘날의 복합 문화 공간인 쇼핑몰까지. 쇼핑몰 입구에 서 있으면 이 모든 시간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낮게 누워 있는 기념비와 수직으로 높이 선 마천루, 그리고 땅 밑에 남아 있을 구치소의 시간들이.”(위의 책, 76쪽)

저자는 ’86세대’인 부모님에게 “민주화 운동이 정확히 무엇인지도 몰랐던 시절부터 들었던 ‘그 사건’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은 중학교 역사 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같은 해에 일어난 6월 항쟁처럼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2만 명 이상이 참여해 1000여 명이 체포되고 184명가량이 구속된, 꽤 치열한 현장이었다고 한다. 당시 치러진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구로구청에 이송된 투표함 일부의 잠금 장치가 개표 시작 전에 해제되어 있던 것이 발단이었다. 시민들로 구성된 공정선거감시단은 투표함이 노태우의 당선을 위해 바꿔치기 되었다고 주장하며 투표함을 개봉할 수 없도록 구로구청을 점거했다. 치열한 농성과 진압 끝에 해당 투표함은 선거 당락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결론이 나며 결국 개표되지 않았고, 이후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선관위 수장고에 보관되었다.”(위의 책, 82쪽)

“선관위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던 투표함은 29년 만인 지난 2016년 7월 개봉됐다. 개봉 결과 총 투표용지 수는 선관위가 당시 파악했던 부재자 투표 4325장 일치했으며, 3133표를 얻은 기호 1번 노태우 후보에 이어 기호 3번 김대중 후보(575표), 기호 2번 김영삼 후보(404표), 기호 4번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후보(130표) 순으로 집계됐다. 이에 사건 당시 부정 투표 의혹의 상당 부분은 해소된 상태다.

‘나의 구로동’, ‘구로공단’과 얼마나 달라졌을까

‘구로공단’을 검색하면, ‘서울디지털산업단지’라는 이름으로 관련 설명이 나온다. 1970년대 섬유, 봉제, 가발, 소형 전자기기 등 제조업 위주의 수출 산업단지였던 구로동 일대는 50여 년이 지난 지금 IT기업, 애니메이션 제작사, 스타트업이 들어선 지식 기반의 디지털 산업단지가 됐다.

그러나 저자는 70~80년대와 2000년대 노동자들의 업무 환경을 비교하며 “제조업을 이끌었던 구로공단과 IT 산업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구로디지털단지는 겉모습은 서로 다를지언정 그곳에 자리한 노동자들의 삶은 다른 점보다 닮은 점이 더 많”다고 했다.

▲ ‘구로공단’ 가발 공장에서 일하는 여공들과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변모한 현재의 구로동. ⓒ구글

저자는 70~80년대 구로공단 여공들이 낮은 천장에 칸막이가 쳐진 작은 공장에서 일하며 폐결핵 등 기관지 계통 질환을 앓았다면, 2000년대 청년 노동자들이 일하는 사무실 시설은 개선됐지만 손목터널증후군이나 거북목, 디스크 등 근골격계 질환을 호소하고 있다고 했다.

“이러한 사실은 기술이 바뀌면 노동의 질이 획기적으로 바뀔 것 같지만, 기술의 유사성을 뛰어넘으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없다면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일자리를 찾아 지방에서 상경해 구로공단에 취직한 어린 여공들이 폐병으로 고통받는 모습과 구로디지털단지 곳곳의 사무실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있을 20대들이 손목터널증후군과 척추 디스크로 힘들어하는 모습이 겹쳐지는 것도 그래서일지 모르겠다.”(위의 책, 112쪽)

저자는 또 ‘구로공단 노동자 생활 체험관’에 전시된 여공들의 숙소였던 한 평 남짓한 ‘벌집’을 소개하며 “벌집은 ‘그때’라는 말로 지칭할 수 있는 먼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꼬집었다.

“벌집이 밀집해 있던 구로공단 인근 주택가에 재개발 계획이 승인된 건 2000년대 이후다. 20년도 채 되지 않은 셈이다. 재개발에 대한 논의가 여전히 진행 중인 동시에, 누군가는 오늘도 벌집에서 생활한다. 비단 구로동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주택보다 아파트가 익숙해진 오늘날의 도시에서도, 각종 통계에 따르면 서울에서만 3000명 이상이 쪽방에서 살아간다.”(위의 책, 131쪽)

저자는 특히 코로나19 초기인 2020년 3월 발생한 ‘구로 콜센터 집단 감염 사태’를 상기하며 70~80년대 여공과 현재 콜센터 상담사 간 유사성을 확인했다.

“콜센터 상담사들의 노동 환경을 연구하는 문화인류학자이자 가정의학과 전문의 김관욱 교수는 (…) 콜센터의 노동이 그곳의 전신인 구로공단 노동과 높은 유사성을 보인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타 산업에 비해 낮은 임금으로 다수의 여성 노동자를 고용하는데 이들은 밀집된 근무 환경과 장시간 노동, 지속적인 감시로 인해 높은 스트레스에 노출된다. 상담사들은 충분한 휴식 시간이 보장되지 않아 이러한 스트레스를 짧은 시간 안에 해소하기 위해 흡연에 기댄다. 그래서 상담사들의 평균 흡연율은 타 직종 근무자보다 높다. 이는 과거 구로공단에서 근무하던 여공들이 카페인 각성제를 먹어 가며 철야 작업에 투입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다.”(위의 책, 143~144쪽)

‘나의 구로동’은 여전히 ‘노동자들의 도시’다

‘구로공단’은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그곳에는 저임금 장시간 노동이 존재한다”는 저자의 말처럼 ‘구로동’은 지금도 ‘노동자들의 도시’다. 그래서일까. 저자는 “해가 바뀔 때마다 고 노회찬 대표의 연설을 다시 찾게 된다”고 했다. “과연 지금의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은 2012년의 6411번 버스가 싣고 있는 세상과 얼마나 달라졌을까 하는 마음”에서.

“인간이 갈 수 있는 모든 공간은 누군가의 일터다. 캄캄한 어둠을 뚫고 출근하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몸을 의탁하는 6411번 버스마저도 버스 기사에겐 일터인 것처럼. 우리가 있는 곳 어디든, 인지하지 못했던 누군가의 노동이 깃들어 있을 것이다. 자신의 노동일 수도, 아니면 이름 없는 누군가의 노동일 수도 있는 흔적이 말이다.”(위의 책, 121쪽)

▲ <구로동 헤리티지>(한겨레출판 펴냄, 박진서 지음)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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