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사박물관은 조선시대 한양의 거주지 실태를 연구한 ‘한양의 세거지(世居地)-서울기획연구 11’ 보고서를 발간했다고 19일 밝혔다. 사진은 18세기 말 서울 사대부 세거지 지도.[서울시 제공]
‘한양의 세거지(世居地)-서울기획연구 11’ 보고서.[서울시 제공]

[헤럴드경제=김수한 기자] 서울 동촌은 무관, 서촌은 하급관리들이 주로 살았고, 남촌은 남인과 소론·소북, 북촌에는 양반과 종친, 중촌에는 중인과 시전상인들이 주로 모여살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역사박물관은 조선 시대 한양의 거주지 실태를 연구한 ‘한양의 세거지(世居地)-서울기획연구 11’ 보고서를 발간했다고 19일 밝혔다.

보고서에 따르면 조선 후기 한양의 인구는 약 19만명으로 신분별·직업별로 모여 사는 경향이 있었다. 한 지역에 대대로 거주한 사례도 많았다.

한양을 동·서·남·북·중 5개 지역으로 나눠 보면 동촌에 반인(伴人)과 무관이, 서촌에 하급 관리가, 남촌과 북촌에는 각각 남인과 소론·소북, 양반과 종친이, 중촌에는 중인과 시전상인이 주로 살았다.

양반의 경우 서울 곳곳에 세대를 거듭해 모여 사는 경우가 많아 거주 지역명이 본관의 별칭처럼 불리기도 했다. 한곳에 오래 거주하다 보니 집안의 고유한 문화가 지역성으로 자리 잡은 사례도 많았다.

조선시대 500년간 회현동에 대대로 살았던 동래정씨(東萊鄭氏)는 회현동 이름을 따 회동정씨(會洞鄭氏)로 불렸다. 이들은 조선 개국 이래 회현동에서 지내면서 한양 조망이 가능한 쌍회정, 재산루, 홍엽정 등을 조성했고 인근 남산 경관 형성에도 큰 역할을 했다.

조선 후기에 사대문 가문은 당파에 따라 거주지가 달랐는데, 소론은 회동 동래정씨를 중심으로 남산 밑에 자리 잡았고 풍산홍씨와 조씨, 전주이씨, 경주이씨, 대구서씨 등도 남산 자락에서 함께 소론 명문가의 집단 거주지를 형성했다.

한양의 동촌에 터전을 이룬 연안이씨(延安李氏)는 관동이씨(館洞李氏)로 불렸다. 황해도 관찰사 등을 역임한 이석형이 동촌에 자리를 잡으면서 동촌이 연안이씨의 터가 됐고 그 후손 이정귀가 관동에 거주하면서 ‘관동파’라는 조선 중기 문인 모임을 주도했다.

정동이씨(貞洞李氏)는 정동에서 거주한 여주이씨(驪州李氏)를 일컫는다. 고려후기 개경에 모여 살았던 여주이씨는 조선시대 한양 일대를 옮겨다니다가 17세기 이상의가 정릉에 정착했다. 그의 증손자는 대표적 실학자인 이익으로, 그는 저서 성호전집에서 “우리 이씨는 증조부 이상공(이상의) 때 정릉에 집을 정한 이래 사람들이 정동이씨라고 불렀다”는 구절을 남겼다.

인왕산 근처 장동에 자리 잡아 장동김씨(壯洞金氏)라 불린 청풍계 안동김씨(安東金氏)도 있다. 장동김씨는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에서 순절한 김상용과 남한산성에서 최후까지 항전하기를 주장한 척화파 김상헌의 후손들로 장동 일대에서 고유한 문화를 형성했다.

지역 이름이 붙지는 않았으나 전주이씨(全州李氏)는 북촌과 용산일대에 모여 살았다. 전주이씨 영해군 파는 인왕산 기슭과 용산의 본가, 두릉(반포)의 별서, 광주 및 저자도의 선영을 운영했다. 이들을 통해 한 집이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본가와 거주지를 이동하면서 어떠한 생활을 영위했는지 살펴볼 수 있다.

이번 연구는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가 책임을 맡았고 이종묵 서울대 교수와 오세현·김세호 경상대 교수, 김하라 연세대 교수가 참여했다.

보고서는 서울시청 지하 1층 서울책방 매장 또는 홈페이지, 서울역사박물관 내 뮤지엄숍에서 구매할 수 있다. 가격은 1만5000원이다.

최병구 서울역사박물관장은 “조선시대 한양 명문가의 거주 실태를 연구한 결과 본관을 떠나 지역명을 성씨 앞에 붙여 통용하는 경우 등 흥미로운 사실들이 발견됐다”며 “앞으로도 서울의 역사에 대해 다양한 연구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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