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 보장되는 최상위권 이공계 계약학과도 이탈 러시
전문가들 “연구 안정성 보장 등 현실적 제도 필요”

의대 쏠림 현상의 심화로 이공계 인재 이탈에 대한 우려가 나오고 있다. 사진은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지난달 6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의대 정원 확대 방안을 발표하고 있는 모습. 이동근기자 foto@etnews.com

의대열풍으로 교육계에서는 이공계 인재 이탈이 심각하다는 우려가 나왔다. 전문가들은 이공계 인력 이탈을 막기 위한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최근 국회에서 열린 ‘R&D 예산 조정 이후, 국가연구 백년지대계를 논하다’라는 주제 토론회에서 참석한 이동헌 KAIST 대학원 총학생회장은 이공계 인재 이탈을 두고 “대한민국에서 경제적 처우나 사회적 명예, 직업 안정성 등 모든 측면에서 연구자는 직업적 메리트를 잃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계약학과도 맥 못 추는 이공계 이탈 러시

이공계 학생들의 이탈은 해마다 늘어난다. 이는 수치로도 나타난다. 지난해 12월 종로학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24학년도 대입 수시 모집에서 서울대에 최초 합격한 수험생 2181명 중 228명(10.5%)이 등록을 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미등록자 87%는 자연 계열 학생이었다. 자연 계열 미등록자는 2022년 156명(13.2%)에서 올해 200명(15.1%)로 늘었다. 미등록자는 다른 대학의 의·치대 등에 진학한 것으로 풀이된다.

2024학년도 정시에서는 취업이 보장되는 계약학과에서도 학생들이 대거 이탈했다. 삼성전자 계약학과인 연세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는 정시 모집인원 25명 중 추가합격자를 포함해 55명이 미등록 하면서 모집인원 대비 미등록률이 220%로 나타났다. 지난해 미등록률 130%를 크게 웃도는 수치다.

또 다른 삼성전자 계약학과인 고려대 차세대통신학과 미등록률은 140%로 지난해 50%와 비교하면 크게 상승했다. SK하이닉스 계약학과인 반도체학공학과와 현대자동차 계약학과인 스마트모빌리티학부의 미등록률도 각 100%와 105%로 지난해(63.6%, 50.0%)와 비교해 큰 폭의 상승세를 보였다.

임성호 종로학원 대표는 “고려대와 연세대 계약학과는 미등록 후 갈 수 있는 점수 라인이 서울대 최상위 학과 아니면 의대 밖에 선택지가 없다”며 “물론 서울대 이공계열로 갔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보다는 의대 진학으로 빠졌을 확률이 더 높다”고 설명했다.

◇의대 정원 확대…이공계 자원 쓸어 담는 블랙홀 될까

최근 의대 정원 확대 규모가 확정되면서 의대 쏠림에 따른 이공계 자원 이탈은 가속화 될 것으로 교육계와 전문가들은 전망한다.

서울 지역 한 대학 관계자는 “이공계열 학과 이탈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의대 정원까지 늘어나면 이탈률은 더욱 거세질 것”이라며 “국민 입장에서 (의대 정원 확대를)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는 있어도 대학 입장에서는 복잡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의협은 이를 의대 증원 반대 근거로도 삼고 있다. 의대증원 첫 TV토론에서 반대 측 인사로 참석한 정재훈 가천의대 예방의학과 교수는 “의대 증원이 이뤄지면 이공계에서 가장 우수한 인력 2000명이 의료계로 넘어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임성호 대표는 “고려대, 연세대 계약학과 이탈률이 첫 번째 시그널이다. 의사로서 희소성이 떨어진다고 판단했다면 학생들의 이공계열 학과 이탈이 줄었어야 하지만 해당 학과의 이탈률은 지난해에 비해 급격히 늘었다”며 “의대 증원이 확정된다고 하면 최상위 이공계열 학생들의 이탈을 막기는 힘들 것으로 본다”고 분석했다.

◇이공계 연구 근간 흔들릴까 우려…조속한 대책 필요

지난해 12월 이공계 이탈현상을 주제로 한 국회 토론회에서는 의대 열풍으로 이공계열 재원이 줄어들면 국가 미래까지도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쏟아졌다. 학계에서는 ‘의대 쏠림’을 방지하기 위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주형규 가천대 물리학과 교수는 “이공계에 올 인재가 의대로 이탈한다 해도 이공계가 완전히 학문적, 기술적으로 약해질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면서도 “이공계 인재 이탈에 대해 당연히 심각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에 주 교수는 구체적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공계 인재들의 직업적 안정성을 제도화 해야한다는 것이다. 대학이나 연구소 소속 박사, 연구교수, 선임연구원 등은 PBS(Project Base System)제도에 따라 연구기관의 연구원 인건비를 30% 보장하고 나머지는 연구 프로젝트를 수주해 충당하고 있어 불안정한 신분이다. 장기간 연구보다 단기성 연구 과제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주 교수는 “연구원들이 사업을 수주하기에 급급해 1년에 자기 연구는커녕 논문 한 편도 쓰기 힘든 게 현실”이라며 “제도적으로 소속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이들 신분을 실질적인 정규직화를 통해 안정적 환경에서 연구를 지속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지희 기자 easy@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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