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즉각 휴전’을 언급한 것이 미국의 기존 입장에서 다소 진전됐다는 평가가 나오는 가운데, 백악관 검토를 거치면서 연설 수위가 조정됐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에서 즉각 휴전을 반대한 미국이 이스라엘에 대한 지지와 국제사회 및 국내 비난 여론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모양새다.

5일(이하 현지시각) 미국 NBC 방송은 3명의 미 행정부 현직 관료와 연설 관련 업무를 맡았던 1명의 전직 관료를 인용, 지난 3일 해리스 부통령이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휴전을 촉구하는 연설을 가졌는데 “국가안전보장회의(NSC) 관계자들이 그의 연설 일부를 누그러뜨렸다”고 보도했다.

방송은 이 관료들이 “해리스 부통령의 연설 초안이 검토를 위해 NSC에 회부됐는데, 여기에는 가자지구의 심각한 인도주의적 상황 및 더 많은 원조 필요성과 관련해 이스라엘에 보다 엄중한 내용이 담겨있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현직 관료 중 2명은 방송에 “초안에는 이스라엘에 (가자지구 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구호 트럭의 추가 반입 허용 필요성을 더욱 직접적으로 촉구했다”고 말했고 이 중 한 명은 “해리스 부통령의 말이 강하긴 하지만 논란의 여지가 없었다”고 평가했다.

앞서 3일 해리스 부통령은 앨라배마주 셀마에서 한 연설을 통해 가자지구 북부 주민들이 구호 트럭에 몰리며 100명 이상 사망한 참사를 언급하며 “즉각 휴전”을 촉구한 것과 함께, 이스라엘에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질책성 메시지를 내놓은 바 있다.

▲ 3일(현지시각) 카멀라 해리스 미 부통령이 앨라배마주 셀마에서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즉각 휴전을 촉구하는 연설을 가졌다. ⓒAFP=연합뉴스

해리스 부통령의 이 발언은 기존 미국의 공식 입장보다 한 발 더 나아간 것으로 평가됐다. 미국은 그간 ‘휴전'(Ceasefire)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안보리에서 제기된 휴전 촉구 결의안도 두 차례나 거부했었다.

또 지난 2월 20일 유엔 안보리는 알제리가 제시한 가자지구 즉각 휴전 결의안을 표결에 부쳤는데 15개 이사국 중 상임이사국인 미국이 거부하고 영국은 기권하면서 결의안 채택에 실패하기도 했다. 이에 22일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남부 라파에 지상군을 투입하는 문제를 두고 열린 안보리 긴급 공개회의에서 미국에 대한 비난이 속출한 바 있다.

당시 미국은 알제리의 결의안에 이스라엘 인질에 대한 석방 요구가 없어 향후 인질 문제를 풀기가 더 어려워질 수 있다면서, ‘즉각 휴전’ 대신 ‘가능한 한 빠른 일시적인 휴전’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해리스 부통령의 ‘즉각 휴전’ 발언은 이스라엘의 군사 행위가 과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주목을 받았다. 방송은 “수천 명의 사람들이 그의 발언을 온라인에 게재하고 많은 매체들이 이를 기사화하면서 입소문이 났다”며 “부통령으로서 존재감이 적다고 계속 지적을 받아 온 해리스 부통령에게는 주목을 받을 만한 순간이었다”고 평가했다.

지난해 해리스 부통령의 연설문 작성자를 역임했던 크리스토퍼 헌틀리는 방송에 “‘즉각적인 휴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위한 분명한 선택이 있었다”며 “매우 명확한 언어였고 직접적이었으며, 이 문제에 대해 정말로 화가 난 젊은 층, 아랍인, 흑인 등의 유권자들의 마음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정부는 이러한 해석에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방송은 현직 관료 3명 중 1명의 관료가 해리스 부통령의 ‘즉각 휴전’ 발언에 대해 “정책의 변화라기보다는 어조의 변화”라며 “휴전에 대한 해리스 부통령의 언급은 바이든 대통령의 발언과 행정부의 입장을 반복한 것”이라고 설명했다고 전했다.

또 커스틴 앨런 부통령 대변인은 이날 방송의 보도가 “정확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부통령은 최근 상황을 고려할 때 가자 지구의 심각한 인도주의적 상황을 해결하고 하마스에 인질 협상 조건을 수용하라는 행정부의 요구를 반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꼈다”는 내용의 별도 입장을 방송에 전달했다. NSC는 방송의 질의에 답하지 않았다.

방송은 “해리스 부통령의 발언을 누그러뜨리려는 움직임은 조 바이든 대통령이 이스라엘 정부에 대한 영향력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이를 통해 인질 거래를 성사시키려 하는 상황에서 백악관이 여전히 공개석상에서 이스라엘 비판을 얼마나 꺼리는지를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한편 해리스 부통령이 기존과 다른 ‘즉각 휴전’을 언급한 배경으로 팔레스타인 상황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는 점과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이 커지고 있는 국내 여론 흐름 등이 꼽히고 있다.

지난 2월 29일 가자지구 북부의 가자시티에서 구호품을 가져가려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구호트럭을 향해 모여들면서 118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벌어졌는데, 이를 두고 가자지구 보건부는 이스라엘의 총격이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스라엘 측은 상황을 진정시키기 위한 제한적 대응을 했다고 반박했다.

여기에 가자지구의 사망자가 3만 명이 넘어가면서 전쟁에 대한 반대 여론도 커지고 있다. 지난 3일 미 일간지 <월스트리트저널>은 2월 21~28일 등록유권자 1500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했는데, 응답자의 42%가 지난해 10월 7일 하마스의 기습 공격에 대한 이스라엘의 대응이 과도했다고 답했다. 적절한 대응이었다는 응답은 24%, 충분히 대응하지 못했다는 응답은 19%에 그쳤다.

이 조사 결과만 놓고 보면 이스라엘의 군사 행위에 대한 긍·부정 평가가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흐름을 보면 부정적 여론이 높아지는 추세다. 지난해 12월 조사에서는 이스라엘의 대응이 적절했다는 응답이 55%로 나타났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여론이 반전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을 정도다.

특히 민주당 지지자의 71%가 이스라엘의 보복이 과도하다고 평가했다는 점도 주목할만한 대목이다. 이러한 흐름이 당장 바이든 정부에 대한 민주당 지지층의 이탈로 나타나고 있기도 하다.

5일 미국 전역에서 치러진 민주당 대통령 선거 후보자 경선에서는 ‘지지 후보 없음’ 이라는 항목이 5~10% 정도의 지지를 받았는데, 이를 두고 미 언론들은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상황을 다루는 바이든 정부에 대한 불만이 표시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미네소타 주의 경우 ‘지지 후보 없음’의 득표율이 20%에 달했는데, 이미 경선을 치른 미시간 주의 13%보다 7% 포인트나 더 많은 수치다. 이를 두고 아랍계를 비롯한 아시아권 및 비백인들이 바이든에게 등을 돌리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러한 경향을 의식한 듯 바이든 대통령은 “휴전이 필요하다. 며칠 내로 (휴전 결과를) 알 수 있을 것”이라며 지지층 달래기에 나섰으나 이집트 카이로에서 진행됐던 휴전 협상이 또 다시 실패로 끝나면서 바이든 정부 역할에 대한 비판 여론이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통신은 이집트 고위 관리를 인용해 휴전 협상이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났다고 보도했다. 미국과 이집트, 카타르 대표단 등 중재국은 지난 3일부터 6주 휴전과 이스라엘의 인질 및 팔레스타인 수감자 교환 등을 논의했으나 이스라엘과 하마스 양측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

▲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월 6일(현지시각) 백악관에서 이스라엘 및 우크라이나 지원을 포함한 긴급 안보 예산안의 통과를 촉구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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