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브라이스 하퍼
▲ 브라이스 하퍼

[스포티비뉴스=이창섭 칼럼니스트] 최근 토미존 수술은 보편화됐다. 성공률이 높아지면서 거의 모든 선수들이 무사히 돌아오고 있다. 심지어 드래프트에서 토미존 수술을 받은 투수들을 뽑는 구단도 있다. 의학 발전이 불러온 축복이다.

그렇다고 해도 토미존 수술은 여전히 부담스럽다. 회복 기간이 길기 때문이다. 투수는 돌아오기까지 1년에서 1년 6개월 정도 걸린다. 자칫하면 한 시즌 넘게 야구를 떠나 있어야 한다. 선수는 물론 팀에게도 막대한 손해다. 특히 팀 내 입지가 약하면 향후 전력 구상에서 완전히 제외될 수도 있다. 잊혀지는 것만큼 두려운 건 없다.

야수는 투수보다 사정이 조금 낫다. 공백기가 더 짧다. 하지만 야수 역시 일반적으로 8개월 정도는 소요된다. 그래서 필라델피아 필리스 외야수 브라이스 하퍼(31)의 복귀는 대단히 놀랍다.

지난해 4월 12일, 하퍼는 외야에서 홈으로 송구하는 과정에서 팔꿈치 통증을 느꼈다. 참고 경기에 나섰지만, 통증이 점점 더 심해졌다. 불길한 예상은 현실이 됐다. 팔꿈치 내측측부인대에 손상이 발견되면서 외야 수비를 전면 중단했다. 필라델피아는 수술을 피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했지만, 결국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소견은 바뀌지 않았다. 일단 하퍼는 “타격은 문제 없다”고 말하며 수술을 미루고 지명타자로 출장했다.

당장 수술을 받지 않은 건 결과적으로 올바른 선택이었다. 덕분에 하퍼는 5년 만에 포스트시즌 무대를 밟을 수 있었다. 초반부터 맹타를 휘두른 하퍼는, 챔피언십시리즈 20타수 8안타(0.400) 2홈런 5타점을 기록하고 MVP로 선정됐다. 비록 월드시리즈 우승은 다음을 기약해야 했지만, 하퍼의 수술 연기는 포스트시즌의 또 다른 추억을 만들어줬다.

축제가 끝나고 하퍼는 수술대에 올랐다. 11월 23일이었다. 필라델피아는 하퍼가 5월 중순 스윙을 할 수 있고, 7월 올스타 브레이크 때 복귀를 노린다고 전했다. 하퍼의 수술을 집도한 의사는 이 부문 최고 권위자 닐 엘라트라체 박사로, 2018년 오타니 쇼헤이의 토미존 수술을 주관한 바 있다. 당시 오타니는 7개월 만에 지명타자로 돌아왔다.

하퍼가 수술을 받고 약 열흘 뒤 윈터미팅이 열렸다. 그 곳에는 하퍼의 에이전트 스캇 보라스가 참석했다. 보라스는 하퍼에 대해 “그는 엄청난 치유력(super healing qualities)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며, 모두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돌아올 것을 장담했다. 

보라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보라스의 말은 허풍이 아니었다. 필라델피아 데이브 돔브로스키 사장은 개막을 앞두고 “하퍼를 60일자 부상자 명단에 올리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전반기 결장이 유력한 선수를 40인 로스터에 그대로 둔다는 것이었다. 이는 필라델피아가 지켜봤을 때도 하퍼의 회복 속도가 대단히 빠르다는 것을 시사했다(만약 60일자 부상자 명단에 등재됐다면 5월 30일까지 돌아올 수 없었다). 돔브로스키는 “긍정적인 상황이지만, 아직 구체적인 시기는 정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하퍼의 이른 복귀가 가시화된 건 4월이었다. 외야에서 몸을 풀던 하퍼가 어느덧 타격 훈련까지 시작한 것이다. 일각에서는 너무 성급하게 움직인다고 지적했다. 그러자 필라델피아는 의사와 트레이너 감독하에 재활이 안전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거듭 강조했다.

시즌 초반 하퍼는 분명 경기에 뛰지 않았다. 하지만 끊임없이 존재감을 드러내면서 마치 경기에 나오고 있는 것 같았다. 대표적으로 하퍼의 1루 복귀설이 있었다. 리스 호스킨스가 무릎 십자인대 파열로 시즌 아웃된 필라델피아는, 하퍼가 팀의 고민을 덜어주기 위해 1루수로 나오길 희망한다고 알려졌다. 덕분에 하퍼는 또 한 차례 화제의 인물이 됐다.

재활에 박차를 가한 하퍼는 기어코 새 역사를 탄생시켰다. 지난 3일 LA 다저스와의 시리즈 2차전에 복귀하면서 수술 후 ‘160일’ 만에 돌아왔다. 토미존 수술 관련 자료를 수집하는 존 로젤에 의하면 토미존 수술을 받은 야수 중 최단 기간 복귀다. 종전 기록은 2004년 토니 워맥의 182일이었다. 참고로 하퍼와 같은 의사에게 수술을 받은 오타니는 218일이 걸렸다.

하퍼의 복귀는 필라델피아 지역 매체가 공개한 자료를 살펴보면 더 믿기 힘들다. 해당 자료에 따르면 2010-18년 토미존 수술을 받은 야수는 137명이었다. 이들은 수술 후 방망이를 휘두르는 데 평균 150일, 그리고 경기에 나서는 데 평균 323일이 걸렸다. 하퍼는 평균 기록을 절반이나 앞당긴 셈이다. 5년 전 자료라는 것을 감안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퍼의 복귀 기간은 가히 충격적이다.

하퍼는 마이너리그 재활 경기를 소화하지 않았다. 필라델피아도 마이너리그 경기는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하다고 판단해 생략했다. 대신 최신식 피칭 머신 트라젝트를 사용해서 감각을 끌어올렸다. 이 기계는 투수별 딜리버리와 구종들을 똑같이 구현해 실제 타석에 들어서는 것처럼 훈련한다. 하퍼는 이 훈련이 마이너리그 경기보다 효율적이라고 여겼다.

2012년 메이저리그 데뷔전을 다저스타디움에서 치렀던 하퍼는 이번 시즌 데뷔전 역시 다저스타디움에서 가졌다. 첫 출장은 4타수 무안타 3삼진에 그쳤지만, 바로 다음 경기에서 3타수 3안타 2볼넷 5출루 경기를 선보여 건강하게 돌아왔다고 신고했다. 

공교롭게도 필라델피아는 하퍼의 복귀와 맞물려 4연패에 빠졌다. 그러면서 힘들게 회복한 5할 승률이 다시 무너졌다. 현재 내셔널리그 동부지구 4위지만, 필라델피아는 작년에도 초반 위기를 극복하고 중반부터 치고 나갔다. 첫 50경기 21승29패 이후 6월부터 66승46패를 기록하면서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했다. 지난해 팀 분위기를 바꾼 결정적인 사건이 감독 교체였다면, 올해는 하퍼의 복귀가 전환점이 되길 바라고 있다. 

필라델피아는 천군만마를 얻었다. 하퍼의 가세는 단순히 타선뿐만 아니라 팀에 전체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하퍼가 쏘아 올린 기적이 필라델피아를 또 한 번 월드시리즈로 이끌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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